[리뷰]이게 바로 뮤지컬…'썸씽로튼'

기사등록 2020/08/12 17:46:04

10월18일까지 충무아트센터 대극장

[서울=뉴시스] 뮤지컬 '썸씽로튼'. 2020.08.12. (사진 = 엠씨어터 제공)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뮤지컬이 우리를 즐겁게 할까. 최근 첫 라이선스 공연을 개막한 뮤지컬 '썸씽로튼'은 그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이다. 지난해 첫 내한공연 기간은 불과 20일이었으나, 마니아들 사이에서 이 작품은 오래 머물렀다.

굳이 말로 해도 될 것을 노래로 하고, 느닷없이 대사를 중단한 뒤 노래를 부르면서 춤을 추는, '뮤지컬은 무엇인가'에 대한 본질적 질문을 유쾌하게 풀었기 때문이다. 대개가 정답을 이미 전제하거나 쉽게 결론을 내리는데 반해, '썸씽로튼'은 지적 유희를 선사하며 '뮤지컬 탄생'의 개념을 재정리한다.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록스타, 아니 K팝 아이돌처럼 군림하던 16세기 영국 르네상스 시대가 배경. 영세한 극단을 운영하는 '바텀 형제'는 무명의 연출, 극작가들이다. 셰익스피어의 인기와 기세에 눌린데다가 창작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과거 자신들의 '바텀 극단'에서 바닥의 연기력을 선보였던, 셰익스피어가 못마땅한 바텀 형제의 형 '닉'은 고민 끝에 결국 예언가를 찾아간다.

최고의 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의 조카라고 주장하는 엉터리 예언가 토머스에게 '미래에 유행할 공연물'을 묻는다. 그는 뮤지컬이라고 답한다. 닉은 흑사병을 주제로 하는 뮤지컬을 만드는데, 후원자로부터 문전박대를 당한다. 더 좋은 소재를 고민하다 결국 그는 '셰익스피어가 쓸 명작을 알아봐달라'고 토머스에게 부탁한다.

월트 디즈니에서 애니메이션 작가로 일한 커리 커크패트릭, '그래미어워즈' 수상자인 웨인 커크패트릭 형제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썸씽로튼'은 2015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은 셰익스피어라는 위대한 작가의 작품과 각종 뮤지컬의 두터운 참조 목록이다.

미래를 내다본 토머스가 앞장서 뮤지컬의 대표 넘버 '어 뮤지컬'을 부르기 시작하는데, 이때부터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웃음을 참지 못하거나 패러디 목록을 알아내기 위한 사투가 벌어진다. 여러 뮤지컬의 넘버, 춤, 장면의 모티브를 조금씩 가져와 섞은 곡이다.

한국에서도 내한공연한 뮤지컬인 '애비뉴 Q'의 손인형을 시작으로 '레미제라블', '시카고', '렌트', '오페라의 유령',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애니', '아가씨와 건달들', '브로드웨이 42번가', '코러스라인', '캣츠', '라이온킹' 등의 멜로디, 장면, 모티브 등이 짧게 녹아 들어간다. 모두 토머스가 미래에서 훔쳐 본(?) 것들이다.  

특히 앙상블들이 자신들의 프로필 사진으로 얼굴을 가리는 명장면으로 유명한 '코러스라인'에 다다르면, 뮤지컬 패러디는 절정에 달한다. 여기에 '렌트', '오페라의 유령', '브로드웨이 42번가'는 현재 서울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들이니 패러디의 즐거움은 배가 된다.

토머스가 "어? 이 나라에서는 이런 뮤지컬도 하네"라고 말하는 장면에서는 한국 창작뮤지컬 '서편제'의 멜로디도 짧게 숨겨져 있다. '코러스라인' 장면에 앙상블들이 들고 있는 팸플릿에 '서편제'가 프린트돼 있기도 하다.

[서울=뉴시스] 뮤지컬 '썸씽로튼'. 2020.08.12. (사진 = 엠씨어터 제공) photo@newsis.com
지난해 내한공연과 올해 라이선스에서 달라진 부분은 한국관객에게 좀 더 익숙한 작품들을 '어 뮤지컬'에 삽입했다는 것이다. 스티븐 손드하임의 '선데이 인 더 파크 위드 조지'처럼 미국에서는 유명하나 한국에서는 다소 낯선 곡도 포함돼 있다. 라이선스의 '어 뮤지컬'에는 '오페라의 유령', '라이온킹', '노트르담 드 파리' 등 한국에 익숙한 작품들의 모티브가 삽입된다. 원작자가 로컬라이즈로 먼저 요청했다.

1막에 '어 뮤지컬'이 있다면, '위키드' 지킬앤하이드' 등이 초반에 언급되는 2막에는 뮤지컬 '오믈릿'을 공연하는 장면이 있다. 토머스는 셰익스피어가 앞으로 걸작 '햄릿'을 쓸 것을 예상하지만, 이를 온전히 읽어내지는 못한다. 제목 '햄릿(hamlet)'에서 'h'를 읽지 못하고 '오믈릿(amlet)'만 읽어낸다.

그래서 바텀 극단의 '오믈릿' 주인공은 오믈릿을 만드는 주요 재료인 달걀이다. '햄릿'의 그 유명한 대사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는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달걀"로 패러디된다. 그리고 토머스는 '대니시(Danish)'를 읽어내는데, 이 역시 '햄릿'의 주인공인 '덴마크 왕자'(Danish prince)에서 대니시(Danish)만 읽어낸 것이다. 이는 덴마크 우유로 변환된다.

우리가 아는 기존 '햄릿'의 이야기에 '사운드 오브 뮤직', '오페라의 유령', '지붕위의 바이올린', '메리포핀스', '브로드웨이 42번가', '드림걸즈' 등의 인물이 마구 섞이고 '맨 오브 라만차', '레 미제라블', '캣츠' 등의 명장면들도 섞여 들어간다.

뮤지컬 속 공연은 갈수록 엉망진창인데, 뮤지컬을 공연하는 뮤지컬을 보는 객석의 만족도와 웃음은 갈수록 커진다. '썸씽로튼(Something Rotten)'이라는 작품 제목은 극 중 뮤지컬 '오믈릿'에 나오는 썩은 달걀 이야기에서 따왔다.

'썸씽로튼'은 도발적이기도 하다. '햄릿'을 원래 닉의 동생인 시인 '나이젤'이 썼다고 능청스럽게 전한다. 엉터리 점쟁이에게 속은 닉이 '오믈릿'에만 집중하고 나이젤이 쓴 내용을 무시, 결국 셰익스피어가 이를 가져다 '햄릿'을 쓰는 이야기로 귀결된다.

그간 잔인하고 비열하게 그려진 셰익스피어의 또 다른 작품 '베니스의 상인'의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이 바텀 극단을 후원하는 '공연 덕후'로 그려진 것도 기발하다. 

셰익스피어와 뮤지컬에 관심이 없으면, 다소 낯설 수 있는 대사와 가사들은 영화 '데드풀' '보헤미안 랩소디' 등을 번역한 황석희 씨의 적확하고 깔끔한 번역 덕분에 생생하다. 황 번역가는 지난해 내한공연에 이어 이번 첫 라이선스에도 참여했다.

[서울=뉴시스] 뮤지컬 '썸씽로튼'. 2020.08.12. (사진 = 엠씨어터 제공) photo@newsis.com
예컨대 닉이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남자 변호사로 변신한 부인인 '비아'의 이름을 부르는 장면에서 원작의 맥락을 잃지 않고, 우리말로 언어유희를 살려내는 묘를 발휘한다. 비아가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 '비아'라는 발음을 이어 받아 말하는 장면인데, 황 번역가는 이를 '비아냥'으로 받아낸다.

'썸씽로튼'의 매력에서 춤도 음악도 빠질 수 없다. 재즈의 그루브가 담뿍 담긴 브로드웨이 정통 뮤지컬 넘버와 탭댄스는 물론 영국 밴드 '퀸'의 화음이 도드라진 팝 같은 넘버까지 다양한 장르가 귀를 즐겁게 한다. 이 뮤지컬의 프로듀서가 박효신, 임재범 등과 작업한 신재홍 작곡가라는 사실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아직까지 많은 사람들이 뮤지컬 관람의 무용함을 말하고 가볍다고 치부하지만, '썸씽로튼'을 보면 뮤지컬이 사랑스러워진다. 순수예술 측에서 상업적으로 치부하며 찬밥 취급하는 뮤지컬 장르에 대한 '유쾌하고 사랑스런 찬가'다.

연극 대사를 하다가 갑자기 노래를 하고 춤을 추는 작품을 누가 보느냐는 닉의 의문에 토머스는 "우울한 감정을 풀어주는 춤과 노래 그리고 달달한 로맨스까지 있다"고 답하는데, 작품이 끝나고 나면 허풍쟁이 같은 예언가의 이 말은 마법처럼 현실이 된다.

'썸씽로튼'은 예언가의 점지를 받아 풍기문란한 공연을 벌인 바텀극단이 영국에서 추방, 신대륙인 아메리카로 가서 퍼뜨린 것이 뮤지컬이라고 선언한다. 뮤지컬은 오페라, 오페레타, 보드빌 등을 거쳐 미국에서 완성됐다.

그래서 '썸씽로튼'을 감히 '뮤지컬계 스타워즈'로 명명한다. 역사가 비교적 짧아 다른 나라들처럼 자신들의 고유 신화가 없는 이민자의 나라인 미국은 '스타워즈' 같은 문화로 자신들의 신화를 만들어왔다. 뮤지컬에서는 '썸씽로튼'이 그 역을 기꺼이 떠맡았다.

한국말로 대사를 하고 노래를 부르다보니, 지난해 내한공연보다 공감도 짙어졌다. 특히 셰익스피어에 밀린 닉처럼 누구가에게 가려져 엉터리 같은 삶의 소재만 붙들고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위로를 전한다. "삶이 달걀을 주거든, 오믈릿을 만들어라"라는 평범하지만 진리의 말. '삶은 달걀'이라는 진부한 수식이 '썸씽로튼'을 보고난 뒤 새롭게 읽힌다.

이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건 배우들이다. 닉 역의 강필석, 이지훈, 서은광은 저마다의 매력으로 가족의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가장의 역할에 대한 책임감을 현실감 있게 그린다. 시인 나이젤 역의 임규형, 노윤, '펜타곤' 여원, 곽동연은 저마다 순수한 열정을 불태운다. 진취적으로 남편을 사랑하는 비아 역의 리사와 제이민, 사랑스런 포샤의 최수진과 이봄소리도 제 역할을 한다.

특히 '똘끼'가 필요한 셰익스피어 역의 박건형과 서경수의 사랑스런 경망스러움, 토머스 역의 김법래와 마이클 리의 능청은 눈여겨봐야 한다. 각종 뮤지컬에 능수능란한 '뮤지컬계 대모' 이지나의 연출, 각종 레퍼런스의 넘버들을 깔끔하게 소화한 김성수 음악감독 공도 크다. 오는 10월18일충무아트센터 대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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