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위험성 폭발물인 질산암모늄 방치가 사고 원인 지목
지도층의 부패와 태만에 대한 분노에 폭발이 촉매 역활
레바논 시민, SNS에 시위 참여 독려…시위 격화 불가피
[서울=뉴시스] 이재우 기자 =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에서 발생한 대규모 폭발의 원인이 항구 창고에 수년간 방치된 고위험성 폭발물 질산암모늄이라는 분석이 잇따라 제기되면서 레바논 시민의 분노가 당국을 향하고 있다. 경제난과 부패 등으로 시민의 불만이 이미 극에 달한 상황에서 이번 폭발이 새로운 촉매로 떠오르는 모양새다.
질산암모늄은 일반적으로 비료 용도로 쓰이지만 폭탄 제조 등 군사 목적으로도 활용 가능하다. 실제 1995년 미국 오클라호마시티 테러 등에서 질산암모늄이 활용된 바 있다. 보관과 사용 과정에서 고도의 안전 조치가 필요하지만 현재 보도에 따르면 레바논 당국은 민가와 인접한 항구에 이를 방치했다.
5일(현지시간) 레바논 알줌후리야와 워싱턴포스트(WP), 알자지라, 영국 아랍전문매체 알알라비 등에 따르면 베이루트항 항만 창고는 수만명이 오가고, 국가 주요시설인 곡물 저장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방역물자 저장고, 값을 매길수 없는 문화예술 유적이 자리잡고 있는 지역에 위치해 있다.
하지만 레바논 당국이 지난 2013년 11월 또는 2014년 무렵 아프리카 모잠비크로 향하던 몰도바 국적 선박에서 압류한 질산암모늄 2750t(TNT 1300t 규모)은 항만 창고에 수년간 뚜렷한 관리 없이 방치됐다. 레바논 보안당국이 폭발 한달전 질산암모늄의 위험성을 지적하면서 노후화된 시설을 즉각 보수해야 한다고 경고해야할 정도였다. 보안당국의 경고에 앞서도 질산암모늄 이전 요청이 있었지만 사법부에 의해 묵살됐다.
폭발 이후에도 레바논 당국은 뚜렷한 행정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폭발 원인을 밝히지 못하는 것은 물론 질산암모늄 폭발로 인한 유해가스 배출에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부상자들도 사실상 방치돼 현지 매체들은 '아마겟돈'을 방불케 하는 상황이 의료시설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폭발로 의료시설과 의료진이 피해를 입고 피해를 입은 의료시설도 부상자 대응 이외 업무를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면서 베이루트 전역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검사도 중단됐다.
내전과 부패, 시리아 난민 유입 등으로 사실상 경제가 파탄난 상황에서 코로나19 확산을 억제하지 못하면 레바논 수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관광사업 재개가 어려워지면 경제 회복도 기대하기 어려워진다.
레바논 산업협회 관계자는 WP에 "실패한 국가를 갖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레바논 시민은 끔찍한 현장을 직접 목격하게 됐다"며 "단순히 정부가 부패한 것 뿐만 아니라 국력이 약하고 정부가 통제력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 등의 문제가 재앙적으로 합쳐졌다"고 토로했다. 한 병원에서 만난 재무 책임자는 '정부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들의 역량 밖이다"고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WP는 이번 폭발 사고의 경위와 책임을 묻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면서 폭발로 인한 충격이 분노로 변해 반정부 시위가 다시금 힘을 얻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알자지라도 이번 폭발은 이미 좌절에 빠진 레바논인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고 전했다.
레바논에서는 지난해 정부 부패와 실정을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져 당시 총리였던 사드 하리리가 물러난 바 있다.
지난 1월 하산 디아브 내각이 출범했지만 코로나19와 금융위기로 통화 가치가 급락하고 식량과 생필품 가격이 치솟는 등 경제난이 고조되자 지난 4월부터 다시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지난해 9월부터 올해 5월까지 주요 식량의 가격이 109% 상승한 가운데 이번 폭발로 레바논내 곡물 상당량이 저장된 저장고가 폭발하면서 식량난도 예상된다.
유엔 산하 식량농업기구(FAO)는 폭발 이후 성명을 내어 레바논에서 밀가루 등 식량 공급난이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레바논 당국은 밀가루를 제한 공급하기로 했다.
더구나 이번 폭발로 사고 현장 인근에 거주하던 2만5000명 이상이 보금자리를 잃고 거리로 내몰렸다. 베이루트당국은 피해 규모가 50억달러 이상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미국과 아랍, 유럽연합(EU) 등 각국이 구호의 손길을 내밀고 있지만 레바논 시민사회는 회의적인 반응을 내놓고 있다. 폭발로 망가진 거리를 치우기 위해 자원봉사에 나선 익명의 학생(23)은 "외국 정부가 지원을 하더라도 정부가 이를 훔쳐갈 것"이라고 불신을 드러냈다.
중동전문매체 뉴아랍 편집장은 알알라비에 게재한 기고문에서 "레바논 시민사회는 폭발의 원인을 1990년 내전이 끝난 이후부터 줄곧 부패하고 태만한 지도층에 의해 방치된 사회기반시설, 무의미해진 건축법과 도시계획 등을 지목하고 있다"며 "이번 폭발이 아니더라도 유사한 문제가 터질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지도층 누구도 이번 폭발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다. 사드 하리리 전 총리는 폭발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현장에 달려갔다가 분노한 시위대에 공격을 당했다"며 "레바논 시민들은 이번 폭발을 계기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부패하고 태만한 지도층을 축출하기 위해 다시 시위에 나설 것을 다짐하고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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