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서 왜곡·폄훼 주장 확대 재생산, 지금도 진행돼 안타까워"
"5·18에 노무현 생각, 광주 항쟁 주역은 아니지만 의미 확장 역할"
문 대통령은 이날 오전 광주MBC를 통해 공개된 5·18 40주년 특별기획 '문재인 대통령의 오일팔' 인터뷰 영상에서 '5·18을 전 국민이 기념하는 민주기념일로 볼 수 없지 않느냐는 의견도 일부 있다'는 사회자의 지적에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 민주주의는 다양한 생각을 허용하고 또 다른 생각에 대해서도 관용하는, 말하자면 표현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 민주주의 기본"이라면서도 "그러나 그 민주주의의 관용이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여러 가지 폄훼에 대해서까지 인정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이 진상을 제대로 규명해 내는 것도 그런 폄훼나 왜곡을 더이상 없게 만드는 하나의 방법"이라며 "조금 더 나아가서 정말 우리 정치 현실이 안타까운 것이 그 추가적인 진실 규명이 없더라도 지금까지 밝혀진 역사적 사실만으로도 광주 5·18이 대한민국 민주화운동의 결정적 상징으로서 존중받기에 충분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미 법적으로도 20여 년 전에 특별법이 만들어져서 그것이 민주화운동으로 규정이 되고, 또 거기에 희생당한 분들이 민주화 운동의 유공자로 인정받기도 하고 거기에 국가기념일로 지정이 돼서 전 국가적으로 기념행사도 치르고, 이 정도면 국민적으로, 국가적으로 정리하고 다음의 장으로 넘어가야 되는 것"이라고 했다.
문 대통령은 "일제 식민 지배에 대해서도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듯이 개인적으로는 다른 생각이 있을 수 있다"면서 "그러나 국가적으로는 일제 식민 지배는 불의한 것이었고, 거기에 저항한 독립운동의 정통성이 있는 것이고, 친일은 심판 받아야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해방 이후에 우리 현대사에 있어서도 국가 발전의 과정에서 독재가 있었고, 그 독재에 맞서서 치열하게 항쟁하고 희생당한 그런 숭고한 민주화운동들이 있었고, 그런 운동들이 오늘날의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이만큼 발전시켰다"며 "그와 함께 우리 경제 발전도 이만큼 이룬 점에 대해서는 이제 역사적 평가가 사실은 끝난 것"이라고 덧붙였다.
문 대통령은 "이 평가를 넘기고 앞으로 민주주의를 얼마나 더 풍부하게, 더 크고 넓게 발전시켜 나가느냐, 또 우리 경제를 얼마나 더 선도적인 경제로 발전시켜 나가느냐, 이런 식으로 우리의 논의가 발전돼 나가야 한다"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하지만) 법적으로 다 정리된 사안을 지금까지도 왜곡하고 폄훼하는 발언들이 있고, 그것을 일부 정치권에서 조차도 그런 주장들을 받아들여서 확대 재생산 하는 일들이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 참 안타깝다"며 "이런 식의 고리를 끊어야 우리 사회가 보다 통합적인 사회로 나갈 수 있고, 정치도 보다 통합적인 정치로 발전해 나갈 수 있다고 믿는다"고 강조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이 시작된 지 40년이 됐다. 대통령께서는 그 때 어디에 있었고, 5·18 소식을 언제 처음 접했는지 말씀해달라.
"저는 그 5·18 전날인 5월17일 비상계엄령이 확대되고, 그 날 바로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구속이 됐다. 그래서 청량리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이 되었 던 중에 저를 조사하던 경찰관들로부터 그 소식을 들었다. 당시 그 경찰관들은 계엄군이 광주에 투입된 그(것)에 대해서 상당히 비판적인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고, 그래서 계엄군의 발포로 많은 광주 시민들이 사상을 당한 사실, 그리고 또 경찰은 발포 명령을 거부해 가지고 시 진압에서 배제가 되었다는 사실, 또는 시민군들이 예비군이나 경찰 무기고를 열어서 무기를 들고 맞서고 있다는 사실, 이런 사실들을 저에게 경찰정보망을 통해서 올라오는 소식들을 매일 매일 전해 줬다. 저는 그냥 들었기 때문에 그런 사실들이 당연히 다 언론에 보도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나중에 석방되고 난 이후에 보니까 그런 사실들은 거의 보도되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로 폭도들의 폭동인 양 그렇게 왜곡돼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저는 광주 바깥에서는 어떻게 보면 가장 먼저 광주의 진실, 그런 것을 접했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대통령에 있어서 광주 시민과 오월 영령들은 어떤 존재였다고 할 수 있나.
"우선은 제가 광주 5·18 소식을 들었을 때 정말 민주화의 아주 중요한 그 길목에 다시 군이 나와서 군사독재를 연장하려고 한다는 그 사실에 굉장히 비통한 그런 심정이었다. 한 편으로 광주 시민들이 겪는 엄청난 고통을 들으면서 굉장히 큰 죄책감을 느꼈다. 왜 그런가 하면 80년 5월 초부터 매일같이 서울역에 서울지역 대학생들이 모여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그런 집회 시위를 열었는데, 거기에 날이 갈수록 숫자가 불어서 5월15일에는 무려 20만 명이 서 울역에 운집을 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군이 투입될 것이라는 그런 소문이 쫙 퍼졌고, 그러자 당시 그 집회를 이 끌고 있던 서울지역 각 대학 총학생의 회장단들이 해산을 결정했다. 그게 이른바 ‘서울역 대회군’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군이 투입될 수 있는 빌미를 줘서는 안 된다는 명분도 있었고, 또 한편으로는 군이 투입되면 아주 희생이 클 것이기 때문에 나중에 상황이 좋아지고 난 이후에 다시 모여야 한다 그런 의견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그때 그 결정에 대해서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나는 그때 경희대 복학생 대표였는데, 나뿐만 아니라 대체로 복학생 그룹들은 '민주화로 가기 위한 마지막 관문이 군과 맞서는 것이기 때문에 군이 투입되더라도 사즉생의 각오로 맞서야 한다. 그 고비를 넘어야 민주화를 이룰 수 있다. 그리고 국제사회가 주시를 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서울지역에서 대학생들을 상대로 아주 가혹한 진압을 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는 생각들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때 총학생 회장단들의 결정을 비난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서울지역 대학생들이 매일 서울역에 모여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대적인 집회를 함으로써 결국 은 군이 투입되는 그런 빌미를 만들어 주고는 결국 결정적인 시기에는 퇴각을 하는 그런 결정을 내린 것 때문에 광주 시민들이 정말 외롭게 계엄군하고 맞서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그 사실에 엄청난 죄책감을 느꼈고, 저뿐만 아니라 광주 지역 바깥에 있던 당시 민주화운동 세력들 모두가 이 광주에 대한 어떤 부채의식, 그것을 늘 가지고 있었다. 그 부채의식이 그 이후 민주화운동을 더욱 더 확산시키고 촉진시키는 그런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당시 광주 오월 영령들을 비롯한 광주 시민들은 우리 1980년대 이후 대한민국 민 주화운동의 상징과 같은 그런 존재가 됐다."
-앞으로 개정될 헌법 전문에 5·18의 가치가 들어가야 한다면 여러 가지 광주 정신이 있다. 어떤 부분들이 꼭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실제로 제가 개헌안 발의를 했다. 비록 국회를 통과하지는 못했지만, 제가 발의한 개헌안 그 전문에 '5·18 민주화운동의 이념의 계승' 이것이 담겨있다. 지금 현재의 우리 헌법 전문에는 3·1운동에 의해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4·19민주운동의 이름을 계승하는 것으로 그렇게만 헌법 전문에 표현돼 있는데, 우리가 발전시켜 온 민주주의가 실제로 문안화 돼서 집약돼 있는 것이 우리의 헌법이다. 그런데 4·19의 혁명만으로 민주 이념의 계승을 말하기에는 4·19혁명 이후에 아주 장기간에 어찌 보면 더 본격적인 군사독재가 있었기 때문에 4·19운동만 가지고는 민주화운동의 어떤 이념의 계승을 말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다시 지역적으로 강력하게 표출된 것이 시기 순서로 보면 부마민주항쟁이었고, 5·18민주화운동이었다. 그것이 전국적으로 확산된 것이 6월 민주항쟁이었고, 드디어 그 미완된 부분 이 다시 촛불혁명으로 표출이 되면서 오늘의 정부에 이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가운데 촛불혁명은 시기상으로 아주 가깝기 때문에 정치적 논란의 소지가 있어서 아직 헌법 전문에 담는 것이 이르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5·18민주운동과 6월항쟁의 이념만큼은 우리가 지향하고 계승해야 될 하나의 민주 이념으로서 우리 헌법에 담아야 우리 민주화운동의 역사가 제대로 표현되는 것이고, 또 그렇게 되어야만 5·18이나 또 6월항쟁의 성격을 놓고 국민들 간에 동의가 이루어지면서 국민적 통합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저는 비록 헌법안 개헌이 좌절되었지만 앞으로 언젠가 또 개헌이 논의가 된다면 헌법 전문에서 그 취지가 반드시 되살아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5·18 37주년 기념식 때 대통령에 당선된 지 채 열흘도 안 돼서 직접 기념식에 참석을 했었다. 5·18 유족인 김소형 씨를 직접 안아 주시는 장면은 제가 듣기로 예정에 없던 그런 장면으로 알고 있다. 그 때의 기억을 한번 되살려 본다면 어떤가.
-37주년 기념식 때 특별한 이름들을 호명을 하셨다. 민주열사들의 이름을 일일이 거명하면서 오월 영령들뿐만 아니라 이들 민주열사들의 이름도 함께 기억해 줄 것을 주문을 했는데 어떤 취지였었나.
"민주화운동은 '광주를 기억하라, 그리고 광주의 진상을 규명하라'는 것이, 그것이 하나의 민주화운동, 그 자체가 바로 민주화운동이었다. 그래서 광주에서도, 또 광주 바깥에서도 굉장히 많은 분들이 광주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고, 또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 노력하다가 목숨을 바친 그런 분들이 상당히 많았다. 그 많은 분들을 다 일일 이 호명하지는 못하고 제가 대표적으로 그 네 분의 이름을 호명했는데, 제가 말씀드리고자 했던 것은 5·18이 광주라는 특정한 지역으로 국한되는 운동이 아니다, 광주 밖에도 많은 5 18 들이 있고, 그래서 광주의 정신이 우리 대한민국 전체의 민주화운동의 정신과 이념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그 사실을 우리 국민들도 기억해야 되고 광주 시민들도 그 사실을 기억하셔야 된다. 그런 말씀을 드리고 싶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아직도 5·18을 왜곡하거나 부정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5·18을 전 국민이 기념하는 민주항쟁 혹은 민주기념일 로 볼 수 없지 않느냐는 의견도 일부 있다. 5·18 왜곡과 폄훼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데, 이와 관련해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
"우선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우리 민주주의는 다양한 생각을 허용하고, 또 다른 생각에 대해서 관용하는, 말하자면 표현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기본이다. 그러나 그 민주주의의 그 관용이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그런 여러 가지 폄훼에 대해서까지 인정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 5·18을 폄훼하고 왜곡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단호한 대응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진상을 제대로 규명해내는 것도 그런 폄훼나 왜곡을 더 이상 없게 만 드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뿐만이 아니라 좀 더 나아가서 정말 우리 정치 현실이 안타까운 것이 그 추가적인 진실 규명이 없더라도 지금까지 밝혀진 역사적 사실만으로도 광주 5·18을 대한민국 민주화운동의 결정적인 상징으로서 그래서 존중받기에 충분하다. 이미 법적으로도 20 몇 년 전에 특별법이 만들어져서 그것이 민주화운동으로 규정이 되고, 또 거기에 희생당한 분들이 민주화운동의 유공자로 인정받기도 하고, 거기에 국가기념일로 지정이 되어서 전 국가적으로 기념행사도 치르고, 이 정도면 국민적으로, 국가적으로는 이렇게 하나 정리하고 다음의 장으로 넘어가야 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다른 생각이 있을 수 있다, 일제 식민 지배에 대해서도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듯이. 그러나 국가적으로는 일제 식민 지배는 불의한 것이었고, 그 다음에 거기에 저항한 독립운동의 정통성이 있는 것이고, 친일은 심판받아야 되는 것이고, 또 해방 이후에 우리 현대사에 있어서도 국가 발전의 과정에서 독재가 있었고, 그 독재에 맞서서 치열하게 항쟁하고 희생당한 그런 숭고한 민주화운동들이 있었고, 그런 운동들이 오늘날의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이만큼 발전시켰고, 또 그와 함께 우리 경제 발전도 이만큼 이루었고 하는 이런 점에 대해서는 이제는 역사적 평가가 사실은 끝난 것이다. 이 평가를 넘기고 이제 앞으로 우리 민주주의를 얼마나 더 풍부하게, 더 크게, 넓게 발전시켜 나 가느냐, 또 우리 경제를 얼마나 더 세계에서 선도적인 경제로 발전시켜 나가느냐, 이렇게 우리 의 논의가 발전돼 나가야 하는데, 법적으로 다 정리된 사안을 지금까지도 왜곡하고 폄훼하는 발언들이 있고, 그것을 일부 정치권에서 조차도 그런 주장들을 받아들여서 이렇게 막 확대 재생산 시켜지는 일들이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 이런 식의 고리를 끊어야 우리 사회가 보다 통합적인 사회로 나갈 수 있고, 우리 정치도 보다 통합적인 정치로 발전해 나갈 수 있다고 믿는다."
-5·18을 상징하는 여러 인물들이 있는데, 대통령이 생각하기에 5·18 하면 생각나는 인물은 누구인가. 왜 그런지도 말씀해달라.
"이야기가 약간 멀어질지 모르겠다마는 저는 5·18 하면 노무현 전 대통령, 그러니까 그 당시의 노무현 변호사가 제일 먼저 생각이 난다. 80년대 이후의 부산 지역의 민주화운동은 광주를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광주를 알게 될수록 시민들은 그 당시 광주가 외롭게 고립돼 희생당했는데 거기에 동참하지 못하고 그냥 내버려뒀던 그 사실에 대해서 큰 부채 의식을 갖게됐고, 그것이 민주화운동의 하나의 또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처음에는 유인물들을 통해서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도 하고, 또 해마다 5·18이 되면 버스를 2대, 3대 전세를 내서 민주화운동 하는 분들이 함께 합동으로 5·18 묘역을 참배하기도 하고, 그러다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난 이후에는 그 당시의 광주의 상황을 촬영한 동영상들, 이른바 광주 비디오라고 부르던, 거의 한 시간 정도 되는 분량이었는데, 그 내용이 너무나 생생하고 정말로 참혹한 것이었다. 누구나 그에 대해서는 다른 해석을 할 수 없는 말하자면 확실한 증거가 되는 그런 비디오였다. 그 비디오들을 처음에는 성당이나 교회에서 몇 사람들이 돌려보다가 나중에는 대학의 동아리들, 학생회 차원에서도 돌려보고, 6월항쟁이 일어났던 87년 5월에는 당시의 노무현 변호사와 제가 주동이 돼서 부산 가톨릭센터에서 5·18 광주 비디오 관람회를 가졌다. 영화를 상영하듯이 하루 종일 모니터로 광주 비디오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면 부산 시민들이 줄을 서서 기다려서 광주 비디오를 보고, 그때 비로소 광주의 진실을 알게 된 그런 분들도 많았습니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지만 한 3, 4일 정도는 한 것 같다. 그런 것이 부산 지역 6월항쟁의 큰 동력이 됐다고 생각한다. 또 부산의 가톨릭센터가 6월항쟁 때 서울의 명동성당처럼 자연스럽게 부산 지역 6월항쟁을 이끄는 그런 중심지 역할을 했다. 그런 일들을 함께했던 그 노무현 변호사, 광주 항쟁의 주역은 아니지만 그러나 광주를 확장 한 그런 분으로서 기억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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