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시, '신여성 나혜석' 독립운동가로 왜곡해 말썽

기사등록 2020/03/02 17:45:14

나혜석 거리 만들고 동상에 독립운동가 표기

보안법 위반 검찰 조사서 친구 범죄행위·소재 밀고

국가보훈처 "나혜석 독립운동가로 보기 어렵다"

[수원=뉴시스] 이병희 기자 = 경기 수원시 팔달구 인계동에 조성된 '나혜석거리'.

 [수원=뉴시스] 이병희 김경호 박다예 기자 = 경기 수원시가 개항기 이후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신식 교육을 받은 여성을 지칭하는 신여성인 나혜석(1896~1948)을 독립운동가로 왜곡해 말썽이다.

2일 수원시민 등에 따르면 수원시는 거리 조성, 전시, 행사 등 매년 나혜석을 '독립운동가'로 홍보해왔다. 친일을 한 구체적인 행적이 없지만 독립운동을 한 구체적인 행적도 없다는 것이다.  

나혜석이 3·1만세운동에 참여한 명확한 기록이 없는데도 5개월 옥살이를 했다는 것만으로 '독립운동가'로 홍보했다. 일제가 문화통치 일환으로 만든 '조선미술전람회(조선미전)'에서 활동한 사실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설명 없이 나혜석 치켜세우기로 역사를 왜곡·미화시키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한 연구위원은 "(나혜석은) 자유연애 선호했다가 배신당하고 쫓겨난 사람이다. 수원시에서 독립운동가로 표기하고 책자까지 내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며 "당시 가부장 사회에서 스캔들 몰고 다닌 여성, '자유부인' 정도로 평가하면 되는 것"이라고 했다. 

◇ 수원시, 나혜석 '독립운동가'로 치켜세우기

수원시는 2000년 나혜석거리를 조성하고, 동상을 세워 나혜석을 '독립운동가'로 표기했다. 당초 수원시는 친일파인 홍난파 거리를 조성하는 계획을 함께 추진했다가 거센 여론에 부딪혀 좌초됐다.

2011년 12월23일부터 2012년 2월26일까지 나혜석의 삶을 조명하고 선양하기 위해 수원박물관에서 '나는 나혜석이다' 전시를 진행했다.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을 기획했던 지난해에는 3월29일부터 6월9일까지 '수원여성의 독립운동'이라는 테마전에 나혜석으로 독립운동가로 소개했다. 이 테마전에서 나혜석은 김향화, 김선경 등 수원여성 독립운동가와 나란히 독립운동을 한 것으로 소개됐다.
[수원=뉴시스] 이병희 기자 = 지난해 경기 수원시에서 펴낸 '대한독립의 길을 걷다'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발간한 '대한독립의 길을 걷다'라는 책의 ‘성안의 독립운동가’라는 부분에도 나혜석은 독립운동가로 소개됐다. 이 책은 수원지역 초·중·고 전체에 배포됐다.
 
신흥무관학교 분교장을 지낸 독립운동가 필동 임면수 선생은 2쪽을 할애한 반면 나혜석은 '생가터'부터 '나혜석을 생각하다', '별처럼 반짝이는 신여성 나혜석' 등 모두 10쪽에 걸쳐 실렸다.

수원시 지원으로 나혜석에 대한 연구활동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2012년부터 2016년까지 9차례 학술대회가 열렸고, '나혜석 학회' 자료집 1~9권이 발간됐다.

 2013년에는 일본에서 나혜석 국제학술대회를 열고, 일본 오사카·교토·도쿄에서 나혜석 관련 사료 발굴을 진행했다. 2014년에는 중국에서 나혜석의 활동과 역사적 위상을 주제로 한·중 학술좌담회를 열고, 중국 대련·여순·단동·심양·하얼빈에서 사료 발굴 작업을 했다.

◇검찰서 3·1운동 가담 스스로 부인…친구 범죄행위·소재 밀고(密告)

나혜석이 3·5이화학당 만세시위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5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지만 증거불충분으로 무죄 방면됐다.

보안법 위반 혐의로 조사를 받았던 나혜석의 당시 신문조서 등에 따르면 나혜석은 1919년 3월2일 박인덕, 김마리아, 신준려, 황애시덕 등과 함께 박인덕의 이화학당 기숙사 방에 모여 논의에 참석했다.

나혜석은 구체적인 내용을 논의하기로 했던 같은 달 4일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 이후 4일 모임에서 황애시덕, 김마리아, 박인덕과 자신이 간사를 맡기로 했다는 내용을 황애시덕으로부터 들었다.
【수원=뉴시스】김경호 기자= 나혜석이 보안법위반으로 체포돼 검사로부터 조사를 받은 1919년 3월18일 신문기록.
같은 달 8일 이화학당 만세사건 관련해 경찰에 체포돼 조사받은 나혜석은 "간사가 되는 것을 승낙했냐"는 질문에 "그때 승낙은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다음에 만나서 상의하겠지만 내가 없을 때 정해서 곤란하다고 말했다"며 부인했다.

3·1운동 관련 박충애와 한 번 만세를 불렀는지를 묻는 질문에 "그렇지 않다. 박충애가 3월1일 평양 어디에선가 만세를 한 번 불렀다고 말했을 뿐이다"라고 답했다.

황애시덕의 소재를 묻자 "동문 안에 있는 경성일보사에 출근하고 있는 방시영의 처제이므로 그가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된다"며 황애시덕의 소재를 구체적으로 알려줬다.

나혜석은 같은 해 8월4일 증거불충분으로 경성지방법원의 면소 및 방면 결정된다.

당시 간사로 언급됐던 4명 가운데 김마리아와 황애시덕은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했다. 김마리아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고, 황애시덕은1963년 대통령표창이 수여되고 1977년 건국포장·1990년 애국장이 추서됐다.

반면 박인덕은 친일 강연과 글을 기고 하는 등 친일행위를 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됐다. 나혜석은 3·5이화학당 만세시위에 가담했던 것 말고는 독립운동 관련 행적이 없어 현재까지도 평가에 대한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 나혜석 결혼 뒤 행적, 독립운동과는 거리 멀어
【수원=뉴시스】이병희 기자 = 경기 수원시 팔달구 수원시립미술관 나혜석기념홀에 전시돼 있는 김우영 초상.
나혜석은 출옥 이듬해인 1920년 자신을 변론했던 김우영(친일파, 1886~1958)과 결혼한다.

김우영은 1919~1921년 항일운동사건의 변호인으로 참여한 기록이 있지만, 1921년 9월 일본 외무성 부영사로 선임되면서부터는 친일파로 변절했다.

나혜석은 1921년 9월 일본 외무성 만주 안동현(현재 단동시) 부영사로 부임하는 남편과 함께 이주했다. 

부영사는 일본 외무성이 3·1운동 이후 융화정책의 하나로 칙령을 통해 만든 특별임용제도다. 조선총독부와 만주 각 지역 영사관 추천을 통해 부영사 선임했는데, 주요 업무는 관내 조선인 단체와의 협의·민정시찰 등이다. 일제는 조선인 처우 개선을 상징하는 대표 사례로 적극 선전했다.

친일반민족진상규명위원회는 김우영이 고위관료인 부영사로 재직하면서 일본의 통치정책에 협력한 행위를 친일반민족행위로 결정했다.
나혜석·김우영 부부는 1923년 3월 일제 소속 경찰관이었던 황옥이 의열단 단원과 함께 중국에서 국내로 폭탄을 반입했다가 발각된 이른바 '황옥사건'에 연루된다. 황옥은 '이중스파이'라는 논란이 많다. 스스로 재판에서 경찰 소속이라고 밝혔고, 경찰 간부가 증언까지 했기 때문이다.

수원시는 유자명(본명 유흥식)이 쓴 '한 혁명자의 회억록'에 김우영과 나혜석이 의열단을 도왔다고 언급된 구절로 이들이 마치 독립운동을 한 것처럼 설명한다.

하지만 유자명이 회고록 다음 구절에 이 사건의 실패에 대해 "그 주요한 원인 일본정부의 외교관인 김우영 부부와 한성 경찰국의 황옥이 이 운동에 참가했기 때문"이라고 쓴 부분은 알리지 않았다.

이후 나혜석의 행적에서도 독립운동가로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1921년 3월 '나혜석 여사의 화회'가 매일신보 게재됐다. 비슷한 시기 경성일보사 내청각(來靑閣)에서 조선 여성 첫 유화 개인전람회를 연다. 매일신보와 경성일보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기관지다.
 
나혜석은 1922년 6월 조선총독부가 주관한 '제1회 조선미전'에 '봄이오다'와 '농가'를 출품해 입선한다.

'조선미전'은 문화통치의 일환으로 조선인 미술가 단체인 '서화협회' 서화전을 견제하고, 한국 근대 미술을 전통과 단절시켜 조선 미술을 근본적으로 개조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나혜석은 1923년부터 1931년까지 김우영과 미국·유럽을 여행했던 1928~1929년(제7·8회 조선미전)을 제외하고 매년 그림을 출품해 입선하거나 3·4등을 했다.

김우영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에는 "1927~1929년 일본 정부의 배려로 미국 및 유럽 각지를 여행했다"고 돼 있는데, 나혜석은 이 기간 남편을 따라 영국,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네덜란드, 프랑스, 폴란드, 러시아, 미국 등을 다니면서 미술관, 박물관, 전시회, 오페라, 천문대 등 관광을 다니며 호화생활을 누렸다.
[수원=뉴시스] 이병희 기자 = 의열단원 유자명(본명 유흥식)이 쓴 '한 혁명자의 회억록'
1930년 김우영과 이혼한 뒤 1931년에는 일본 문무성 산하단체인 제국미술원이 개최한 제12회 제국미술전람회에서 '정원'이라는 작품으로 입선까지 했다.

또 1931년 매일일보사 사장을 지낸 '아베요시에'와 박희도를 만나 압록강 상류를 여행했다. 함께 여행 떠난 박희도는 일제강점기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이지만, 1930년대부터 친일파로 변절한 인물이다.

'이혼고백서'를 비롯한 나혜석의 1930년대 글은 대부분 김동환의 주재로 발행된 '삼천리'를 통해 공개됐다. 김동환은 1938년부터 삼천리를 통해 조선인 지원병의 당위성을 주장했고, 지원병·징병을 선동하면서 친일 언론으로 돌아섰다.

나혜석은 삼천리가 친일 언론으로 돌아선 1938년 이후에도 삼천리에 작품을 발표했고, 1939년 '삼천리에 너무 많은 폐를 끼치고 산다'라는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1945년 8월15일 광복을 맞이한 뒤에도 나혜석이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혜석은 1948년 12월10일 서울 원효로 시립자제원(慈濟院)에서 행려병자로 사망한다.

◇ 국가보훈처 "나혜석, 독립운동가로 보기 어렵다"

국가보훈처는 나혜석을 독립운동가로 보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보훈처는 1995년 '적극적으로 3·1운동에 참여했는지 여부와 이후 행적이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나혜석을 추서 대상에서 제외했다.

무죄 방면된 경우 보훈 대상으로 보지 않으며, 일제가 문화통치 수단으로 사용했던 조선미전에서의 입상이 독립운동가의 행적으로 볼 수 없다는 설명이다.

2016년 나혜석 유족이 신청한 심사도 같은 이유로 제외됐다.

보훈처에서 언급했듯 나혜석이 3·1운동 만세시위나 3월5일 이화학당 만세시위에 참석했는지는 명확한 기록이 없다.
[수원=뉴시스] 이병희 기자 = 지난해 3월29일부터 6월9일까지 수원박물관에서 진행된 '수원여성의 독립운동' 테마전.
그런데도 수원시는 '수원여성의 독립운동' 테마전 도록에 "나혜석이 1919년 3월1일 당일 서울의 만세시위에 참여했는지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지만 참여했을 가능성이 크다", "서울에 없었던 3월4일 모임에서 김마리아 황애시덕 박인덕과 함께 4명의 간사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됐다. 그만큼 나혜석의 역량과 역할에 기대하는 바가 컸다는 반증이다"라는 식으로 나혜석을 독립운동가로 왜곡했다.

수원박물관 관계자는 "국가에서 인정한 독립운동가만 독립운동가로 보는 것은 아니다. 나혜석이 5개월 동안 투옥된 것은 사실"이라며 "수원 여성의 독립운동이라는 차원에서 활동 사실 자체를 전시에 포함한 것 뿐"이라고 해명했다.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기획실장은 "현재까지 자료로 나혜석은 그 시대를 살아간 예술인으로 평가해야 한다. 문화예술인으로 평가하면 된다. 굳이 거기다 독립운동가라고까지 수식을 달아줄 필요는 없다. 그런데 굳이 고집하고 있는 것"이라며 "나혜석을 독립운동가로 하려면 다른 기준도 바뀌어야 한다. 나혜석 하나 독립운동가 만들기 위해 다른 사람도 만들 수는 없다. 현재 기준으로 보면 독립운동가로 보기 어렵다"고 했다.
 
이어 "수원시는 개인이 아니다. 문중도 아니고, 재야 시민단체도 아니고, 공공기관이자 법률에 근거한 공공기관이자 지자체다. 국가보훈처의 결정을 따라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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