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개봉한 '그녀'(Her)에서처럼 인공지능(AI)과 사랑에 빠지는 일이 발생할 수 있을까.
매년 첫 달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나흘간 열리는 세계 최대 가전쇼 'CES'는 올해도 인공지능(AI) 경연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단순히 음성인식을 하는 정도에 그친 예년과 달리 기업들은 스마트홈, 커넥티드카, 로봇 등에 접목해 더 고도화된 AI 기술력을 과시했다.
특히 4500여개 참가사 중 최대 규모의 전시장(3368㎡)을 조성한 삼성전자가 극비리에 추진해온 인공인간 프로젝트 '네온'(NEON)을 공개해 주목을 받았다. 다양한 인종, 성별, 복장을 한 20여개의 다른 인격체를 가진 캐릭터들이 디스플레이 화면에서 다양한 표정을 짓고 간단한 대화를 시연하는데 그쳤지만 AI가 '비서'에서 나아가 '친구'가 될 '인공 인간'을 제시해 화제를 모은 것이다.
2000년대 후반부터 미국을 시작으로 AI 기술 개발은 빠른 속도로 진화하고 있다. 암을 진단하고 수초 만에 치료법을 제시하는 의사 AI, 복잡한 판례 분석을 몇초 만에 끝내는 변호사 AI, 통계자료를 바탕으로 정확하게 기사를 작성하는 저널리스트 AI, 어떤 주식을 사면 좋을지 알려주는 애널리스트 AI 등이 잇따라 출시되돼 우리의 일상을 변화시키고 있다.
20년 후쯤에는 호모 사피엔스(인류)와 로봇 사피엔스(AI 로봇)가 각각 절반을 차지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온다. AI를 빼고는 기업과 국가의 미래를 얘기할 수 없는 위기감까지 조성됐다. 이에 글로벌 기업들은 AI 기술을 선점하기 위해 대규모 투자와 인재 확보를 위해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이렇게 각국이 AI에 사활을 거는 이유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AI는 그 어떤 기술보다 강력한 혁신과 성장의 발판으로 꼽히기 때문이다. 스스로 학습하고 판단까지 가능한 AI는 IT뿐 아니라 의료, 금융, 교육, 건설, 유통, 보안 등 전산업에 적용돼 기존과 차원이 다른 스마트한 서비스를 가능케 할 것이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다. 또 기존의 산업 구조를 탈피해 저성장에서 고성장으로 경기 흐름까지 바꿀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삼성 AI 기술력 세계에서 두각…세계 AI 특허 순위 4위
한국은 2013년 세계에서 가장 바둑을 잘 두는 이세돌 9단을 이긴 구글 '알파고 충격'을 계기로 AI 기술 개발이 본격 시작됐다.
삼성은 국내 기업 가운데 AI 기술력에서 가장 선두에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4월 133조원을 투자하는 내용의 '반도체 비전 2030'을 발표하고 시스템 반도체를 기반으로 한 AI 기술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또 2017년 11월 '삼성 리서치'를 출범시켜 산하에 AI 센터를 신설, AI 관련 선행 연구를 시작했다. 또 미국, 영국, 캐나다, 러시아 등 현재 5개국에 7개의 AI 연구센터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인재 확보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세바스찬 승 교수(미 프린스턴대), 위구연 교수(하버드대), 다니엘 리 교수(코넬공대) 등 세계적인 석학을 영입하는 한편 선행 연구개발 인력을 올해까지 1000명 이상(국내 약 600명+해외 약 400명)으로 확대할 예정이다.
삼성의 AI 성과도 가시적이다. 독일 시장조사업체인 아이플리틱스가 최근 발표한 AI 기술 특허 보유 기업 현황에서 삼성전자는 지난해 1월까지 1만1243건의 AI 특허를 보유해 1위 마이크로소프트(1만8365건), 2위 IBM(1만5046건)에 이어 3위에 이름을 올렸다.
국내 최대 인터넷 기업인 네이버도 AI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네이버는 지난달 일본 자회사 라인과 소프트뱅크 자회사 Z홀딩스와의 통합을 발표하면서 '세계를 리드하는 AI 테크 컴퍼니'를 내세웠다. 이 통합법인은 이를 위해 매년 1000억엔(약 1조700억원)을 AI 분야에 투자한다는 계획이다.
네이버는 또 지난해 10월 AI 개발 영토 확장의 첫 단계로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AI 연구 벨트' 구축 계획을 공개했다. 주 사업 지역인 한국과 일본을 시작으로 베트남(동남아시아)을 거쳐 프랑스(유럽)까지를 하나의 연구 네트워크로 묶는다는 것이다.
석상옥 네이버랩스 대표는 "국경을 초월한 AI 연구 벨트가 장기적으로 GAFA(구글·아마존·페이스북·애플)를 중심으로 한 미국과 중국 BATH(바이두·알리바바·텐센트·화웨이)의 기술 패권에 맞설 새로운 글로벌 흐름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앞서 네이버는 2017년 6월 프랑스 그르노블에 있는 미국 제록스의 AI 연구소를 인수해 '네이버랩스 유럽'을 세웠다. 이 연구소는 구글의 딥마인드, 페이스북의 AI리서치센터, 마이크로소프트의 MS 리서치센터 등과 함께 세계 AI를 선도하는 4대 연구소로 꼽힌다. 네이버는 2018년부터 2600억원을 투입, 유럽 현재 AI 스타트업 육성에 나서고 있다.
또 현대기아차는 자율주행차의 두뇌 역할을 하는 AI 기술을 중심으로 투자와 M&A를 진행하고 있다. LG그룹은 LG전자·LG디스플레이·LG화학·LG유플러스·LG CNS 등 5개 계열사가 총 4억2599만 달러를 출자해 설립한 투자사인 LG테크놀로지벤처스를 통해 AI 기술 확보에 나서고 있다.
SK텔레콤은 한국 기업 간의 'AI 초협력'을 제안하는 등 ICT 기업으로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KT그룹은 지난해 10월 'AI 컴퍼니'로의 재도약을 선언하고 향후 4년간 3000억원을 투자하고, 전문인력 1000명을 육성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韓 AI 경쟁력, 각 분야 1위국 절반 수준에도 모두 못 미쳐"
대기업들이 앞다퉈 AI 기술 개발에 나서고 있지만 한국의 AI 경쟁력은 미국, 중국 등 글로벌 선도국과 비교해 격차가 크다는 지적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 한국정보화진흥원(NIA)이 지난달 발표한 '2019 NIA AI 인덱스-우리나라 AI 수준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AI 각분야 지표에서 한국은 1위 국가와 비교했을 때 절반 수준 이상인 지표가 한 건이 없을 정도로 주요국과 차이가 컸다. 조사 대상국은 미국, 중국, 일본, 영국, 독일, 인도, 이스라엘 등 글로벌 주요 7개국이다.
또 1위 국가와 견줘 지난해 한국의 ▲AI 특허등록 수는 36.8%(497건·3위) ▲AI 논문등록 합계 8.4%(37건·6위) ▲AI 시장 규모 6.2%(4760만 달러·4위) ▲AI 스타트업수 33.4%(465개·2위) ▲AI 대학교·대학원수 0%(0개·꼴찌) 등 수준에 그쳤다.
황현주 한국정보화진흥원 정책본부 미래전략센터 주임은 "1위 국가의 AI 데이터값을 100%로 보았을 때, 우리나라가 선도국의 반 이상이 되는 지표가 한 건도 없을 정도로 선도국과 격차가 매우 큰 상황"이라며 "민관학이 협력해 연구개발이 사업화로 이어질 수 있도록 유기적인 연결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AI 인재·데이터 확보에 총력…규제도 재정비 해야"
한국의 AI 발전이 뒤처지는 이유는 복합적이다. 우선 불필요한 규제 등 제도적으로 G2와의 AI 기술 격차를 좁힐 수 있는 뒷받침이 미약하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또 AI 인재 수준이 양과 질 면에서 모두 뒤처진다. 국내 대기업들이 주로 해외에서 AI 연구소를 세우고 기업을 사들이는 배경이기도 하다. AI 인재 양성을 서둘러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AI 기술 개발에 핵심인 데이터의 양과 질 수준도 크게 떨어진다. 기업들이 개인정보를 비식별화해 데이터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데이터 3법'이 이달에서야 겨우 국회 문턱을 넘는 실정이다.
이에 반해 미국은 앞선 기술력과 글로벌 한 규모의 사용자를 바탕으로, 중국은 세계 최대의 인구와 사회주의 체제라는 이점을 활용해 방대한 양질의 데이터를 쌓고 있다. 데이터는 쌓이면 쌓일수록 AI 학습량이 기하급수적으로 진보한다.
신지웅 지능정보산업협회 팀장은 "데이터 3법이 통과됐다고 하지만 여전히 미중에 비해 양질의 데이터를 쌓을 수 있는 여건은 열악하기 그지없다"면서 "데이터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아무렇게나 쌓아놓았고, 미국처럼 글로벌한 사용자를 확보해 놓은 것도 아니고 중국처럼 정부 주도로 빠르게 확보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향후 데이터를 정교하게 쌓아나갈 수 있도록 정부의 리더십, 기업의 협력 체계, 사회의 인식 변화 등 총체적으로 구축 및 개선해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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