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부대서 나와 이미지 나빠…이젠 현대인 사로잡는 퓨전식
처음엔 햄, 쏘시지 등 볶아 먹다가 '음식 양' 늘리려 찌개로
의정부 오뎅식당이 원조…용산, 송탄 등 찌개마다 '색다른 맛'
영화에서 아이들은 미군이 던지는 초콜릿을 받기 위해 미군 차량을 뒤쫓아 가며 서로 싸운다.
얼굴이 멍이 들도록 맞아도 끝까지 초콜릿을 움켜쥐고 빼앗기지 않는 장면은 아직도 가슴이 찡하다.
단순히 시대상을 표현하는 장면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전쟁을 겪으며 매일 먹을 것을 걱정해야 했던 당시 국민들의 삶은 하루, 하루가 치열했다.
그렇게 전쟁은 끝나고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면서 미군부대 주변을 중심으로 설탕, 면, 밀가루, 생필품 등 속칭 '미제' 물품들이 흘러나왔다.
특히 경기북부는 접경 지역이라는 특수성 탓에 대규모로 미군이 주둔했고 그런 미군에 의해 처음 맛을 보게 됐던 햄이 한국식 찌개로 만들어지면서 '부대찌개'가 탄생한다.
전쟁 이후 대한민국은 경제 재건을 위해 분주했다. 폐허가 된 건물과 도로가 하나, 둘 다시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해야만 하루 먹거리를 간신히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던 1960년대 초 어느 날 경기 의정부에서 오뎅을 팔던 한 포장마차에 미군부대 장병과 군속들이 찾아오면서 서양과 한국식이 결합한 '짬뽕 음식'이 만들어진다.
미군부대 손님들은 부대에서 햄과 소시지 등을 챙겨와 먹을 수 있게 요리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처음에는 간단하게 햄, 소시지를 볶은 요리를 만들었지만 나중에는 물과 함께 한국 대표 음식인 김치 등을 넣고 끓여 찌개로 만들어 내면서 '부대찌개'가 탄생한다.
지금의 부대찌개보다 부대볶음이 원조라는 얘기가 나오는 배경이다.
물을 넣어 끓여먹다 보니 볶음보다 더 많은 사람들과 음식을 나눌 수 있었고, 당시 어려웠던 경제 상황에서 이만큼 걱정 없이 먹을 수 있던 음식도 흔하지 않았다.
그런 부대찌개는 미국 식재료가 추가된 한국식 퓨전음식이면서도 한국 정서와 애환이 고스란히 담겼다.
우선 햄과 소시지, 베이크드 빈스(콩과 토마토를 이용해 만든 콩 통조림) 등 미국에서 받은 재료는 그대로다.
여기에 두부, 떡, 라면, 당면, 김치 등 한국 식재료 등이 어우러져 한꺼번에 끓인다.
찌개에 필요한 육수는 다시마와 멸치를 기본으로 우려낸 육수를 사용한다.
건새우와 표고버섯 혹은 양송이버섯을 넣은 국물을 쓰는 곳도 있으며 기본 육수에 더해 부대찌개 식당마다 고유의 비법이 있다.
냄비에 온갖 재료를 세팅하고 육수를 붓는다. 기본적으로 햄, 소시지, 두부, 익은 김치를 넣고 선택사항으로 밑간 한 다진 고기, 배추 속대, 만두, 불린 당면, 떡, 치즈 등이 들어가기도 한다.
양념은 고춧가루, 간장, 다진 마늘, 다진 파, 다진 생강을 인원수대로 맞춰 넣는다. 반면 고추장을 넣을 경우 텁텁한 맛을 유발해 사용하지 않는다.
강한 불에 5분여 끓이면 한국식 매콤한 맛과 서양의 단 짠맛을 느낄 수 있는 찌개가 완성된다.
부대찌개와 단짝으로 식당마다 내놓는 시원한 동치미는 입안의 매운맛을 상큼하게 잡아줘 궁합이 맞는다.
부대찌개는 미군부대 영향으로 탄생한 탓에 의정부 뿐만 아니라 용산, 송탄 등에서도 만들어졌다.
이들 지역 부대찌개는 이름은 같지만 지역마다 개성이 있다.
용산의 '존슨탕'은 처음에는 특별한 이름이 없었지만 1966년 린든 B. 존슨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면서 '존슨탕'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서울에서만 맛볼수 있는 존슨탕은 햄 등 부대찌개와 기본 재료가 비슷하지만 김치 대신 버터와 양배추가 들어가는 점이 다르다.
때문에 의정부 부대찌개가 한국식이라면 존슨탕은 미국식 부대찌개인 셈이다.
송탄 부대찌개는 소시지와 햄을 많이 넣고 치즈가 들어간다. 여기에 사골 육수를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캠프306 부대찌개 식당 임수진 대표는 "미군 부대가 있는 곳마다 60년대 부대찌개로 불리는 음식들이 만들어졌고 지역 특색 만큼 음식의 특색도 다르다"며 "이 가운데 의정부 부대찌개가 가장 한국식 조리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허영만 만화에 등장하는 '부대찌개' 전국으로 확산
부대찌개 원조로 많이 알려진 '오뎅식당'은 의정부 호국로에서 영업 하고 있다.
60년 전통의 이 노포는 고(故) 허기숙 할머니가 시작해 3대째 영업을 이어오고 있다.
오뎅을 팔던 포장마차 자리에 '오뎅식당' 간판이 걸린 뒤 주변 상권은 시간이 흘러 자연스럽게 부대찌개 거리로 탈바꿈했다.
골목 입구부터 20여 곳의 부대찌개 식당들이 성업 중이다. 이를 특화 시켜 아치 형태의 부대찌개 거리 간판이 세워지면서 의정부의 대표 먹거리 골목으로 변신했다.
지난 주말 찾아간 의정부 부대찌개 거리에는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부터 노부부, 학생들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부대찌개를 즐기고 있었다.
낡은 건물에 좁은 식탁과 의자를 두고 옹기종기 모여 부대찌개를 먹었던 옛 모습은 시간이 흘러 장소는 같지만 식당마다 개성 있는 간판이 내걸리고 새로운 건물이 자리 잡았지만 부대찌개의 정통은 젊은 세대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연인과 데이트를 즐기러 온 박정균(23)씨는 "할아버지께 옛날 부대찌개와 당시 시대 분위기에 대한 이야기를 를 많이 들어서 유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며 "전통 식재료와 우리 세대 입맛에 맞는 먹거리가 어우러진 부대찌개는 전통과 새로운 맛이 살아 있어 이곳을 즐겨 찾고 있다"고 말했다.
의정부 부대찌개가 전국에 이름을 알린 건 입소문도 있지만, 허영만 화백의 2003년 만화 '식객'에 오뎅식당이 나오면서 확산됐다.
만화에 등장하는 음식점들은 실제 존재하는 곳들로 현재까지도 많은 식객들이 찾고 있다.
이같은 인기로 매년 의정부 부대찌개 거리에서는 부대찌개 축제도 성대하게 열리고 있다.
◇부정적인 이미지 탓에 '고민' 있었지만 대중음식 '굳건'
연령과 상관없이 남녀노소에게 부대찌개가 인기를 끌면서 한때 식당명과 관련 '원조' 소송이 벌어지기도 했다.
의정부에서 원조로 자리 잡은 오뎅식당 인근의 한 식당이 이름을 ‘○○○원조오뎅 의정부부대찌개’로 바꾸고 식당 벽면 유리와 출입문에 큰 글씨로 ‘오뎅식당’이라고만 표기하면서 2013년 두 식당이 ‘원조’ 상호를 놓고 맞소송을 벌였다.
결국 법원은 그동안 진짜 원조로 인정받아 온 오뎅식당의 손을 들어줬다.
부대찌개가 유명세를 치르면서 의정부시의 고민도 깊어졌다.
부대찌개가 대표 먹거리로 자리 잡았지만 각종 도시 개발이 이뤄지면서 군사도시의 이미지를 벗기 위해 주력해 온 의정부시 입장에서는 '부대'라는 단어가 도시 이미지에 나쁜 영향을 주고 있다고 판단했다.
또 과거 미군 부대에서 먹다 남은 햄 등이 흘러나와 이를 섞어 만든 음식이라는 부대찌개에 대한 일부 부정적 인식도 벗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의정부시 관계자는 “어느 날 차량 내비게이션에서 의정부를 소개하는데 부대찌개에 대해 미군들이 먹다 남은 음식을 모아 끓인 음식이라는 설명을 들었다"며 “당시 내비게이션 회사에 부대찌개 설명 정정을 요구했지만 과거 어려웠던 시절에 만들어진 음식이라는 인식 때문에 일부 잘 못 전해진 내용들이 많았다"고 설명했다.
이같은 이유 등으로 '의정부 부대찌개'를 '의정부 명물찌개'로 명칭을 바꿔 부르려는 노력이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 사이에 오랜 기간 불린 부대찌개 명칭은 쉽게 바뀌지 않았고 지금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부대찌개 인기는 기업들의 프랜차이즈 사업에서도 알 수 있다. 기업들이 부대찌개를 메인 메뉴로 내세워 전국에 프랜차이즈 매장을 운영 중이다.
부산에서 '의정부 부대찌개', '동두천 부대찌개'라는 상호를 걸고 영업하는 식당이 이젠 낯설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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