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 건설현장서 발주처 공사비 '미지급·단가 후려치기 갑질 '여전'
"다음 입찰 불투명"…중소건설사들, 발주처 갑질에 남모를 '속앓이'
'공사대금 지급 보증 의무화' 건산법 개정 법률안 국회 본회의 통과
건설공제조합, 건설업 전용 '민간공사대금채권공제 상품' 내달 출시
【서울=뉴시스】박성환 기자 = "공사대금을 제때 지급받지 못해 부도 직전까지 내몰렸어요."
직원 30명의 중소건설사를 운영하는 A(58)씨는 지난 2017년 경기도 광주의 한 아파트 단지 신축공사 하도급 입찰에 참여했다. 입찰 직후부터 발주처의 무리한 요구가 계속됐다. 심지어 당초 설계에 없던 2000만원 가까운 부대시설 비용을 A씨에게 떠넘겼다. A씨는 무리한 요구에도 '공사대금을 계약서대로 지급하고, 추가 공사를 맡기겠다'는 발주처의 약속을 철석같이 믿고 공사를 진행했다.
준공을 앞두고 계약서에 따라 공사대금을 달라고 요청했지만, 발주처는 추가 시공을 요구하며 지급을 차일피일 미뤘다. A씨는 추가 시공을 마친 뒤 수차례 공사대금 지급을 요청한 끝에 발주처로부터 당초 계약조건보다 8000만원 깎인 공사비를 받을 수 있었다. 추가 공사비 청구는 엄두도 못 냈다. 다음 공사 때 입찰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
A씨는 "하도급사는 발주처의 무리한 요구에 어쩔 수 없이 응할 수밖에 없고, 공사비를 제때 달라고 요청하기도 어려운 게 현실"이라며 "무리한 요구를 거절하면 다음 공사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원청의 불합리한 관행에 따를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민간 건설공사에서 공사대금을 제때 지급받지 못하거나 발주처(원청)와의 분쟁 등으로 '생(生)과 사(死)' 기로에 선 중소 건설사들이 적지 않다.
공사대금과 관련한 원청의 이른바 '갑질'로 인한 중소건설사들의 피해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갑질은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버젓이 행해진다. 발주처가 추가 공사 대금을 일방적으로 떠넘기거나 준공을 앞두고 일방적으로 계약해지를 통보하는 건 다반사다. 심지어 공사대금을 일방적으로 깎는 이른바 '단가 후려치기'도 모자라 아예 지급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발주처의 공사대금 미지급 위험으로부터 중소건설사들을 보호할 수 있는 안전장치인 건설업 전용 '민간공사대금채권보험'(매출채권보험) 출시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자금 사정이 열악한 중소건설사들에 대한 대형 건설사들의 갑질은 이미 건설업계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중소 건설사들은 불공정한 계약과 원청의 무리한 요구, 불합리한 제도 탓에 공사대금을 제대로 받지 못해 부도 위기에 내몰리더라도 보호할 장치가 마땅치 않은 게 현실이다.
현재 공사대금 보호장치로는 신용보증기금의 '매출채권보험'과 SGI서울보증보험의 '공사대금지급보증', '매출채원신용보험' 등이 있다. 하지만 까다로운 가입조건과 절차, 높은 보험료, 제조업 중심의 설계 등의 이유로 중소건설사들의 외면을 받고 있다.
통계를 보면 최근 5년간 민간 건설공사에서 중소건설사들이 공사비를 지급받지 못한 경우가 456건에 달한다.
한국건설산업연구원이 지난해 10월15일부터 31일까지 건설공제조합 조합원(410개 중소건설사)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최근 5년간 민간공사에서 지급받지 못한 미수령 건수가 총 456건으로 집계됐다. 공사대금을 지급받지 못한 기업의 평균 미지급 건수는 2.7건. 평균 미수령금액은 16억6000만원으로 나타났다.
민간 건설공사에서 발주처의 공사대금 미지급 원인으로 대금지급 능력 미약이 32.1%로 가장 많았다. 이어 발주자의 의도적인 대금 삭감·미지급 시도(24.7%)와 설계변경 불인정(19.8%), 하자 인정을 둘러싼 갈등(9.9%), 사전 불공정 특약체결(3.7%), 발주자의 불공정한 요구에 대한 불응(2.5%) 등이 뒤를 이었다.
현행 '건설산업기본법'(건산법)에는 하청이 원청에게 지급보증이나 담보를 요구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공사대금을 지급하지 않아도 이를 강제할 수단이 없어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계속됐다.
이에 지난해 6월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소속 자유한국당 김현아 의원이 발주자의 불합리한 공사대금 미지급을 방지하기 위해 지급보증을 의무화하는 '건산법 일부개정 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
개정안에는 발주자의 대금지금보증을 의무화했다. 발주자가 이를 이행하기 어려우면 수급인이 그에 상응하는 '매출채권보험' 가입에 필요한 보험료를 지급하도록 했다. 위반할 경우 50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하는 제재 규정도 신설했다. 개정안은 지난달 31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상태다.
건설업계는 이번 개정안의 통과를 반기는 모양새다. 건설업 전용 매출채권보험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건설업계가 꾸준히 제기해 왔기 때문이다. 실제 설문조사에 참여한 건설기업의 80.3%가 건설업 전용 매출채권보험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채권보험을 운영할 주체로는 응답 기업의 78.0%가 건설업 특징을 잘 아는 건설공제조합이 나서야 한다고 답했다. 건설업 전용 매출채권공제(보험)를 공제조합이 출시해야 안정적으로 운영이 가능할 것이라는 견해를 내비친 셈이다. 응답자 중 72.1%는 가입 의사를 표시하기도 했다.
건설업 특징을 잘 아는 건설공제조합은 이같은 조사를 토대로 조합 최초로 건설업 전용 '민간공사대금채권공제(보험) 상품'을 개발했다. 감독기관인 국토교통부로부터는 지난달 28일 인가를 받기도 했다.
민간공사대금채권공제는 민간발주자와 도급계약을 체결한 건설사업자가 건설공제조합의 공제상품에 가입하고, 발주자의 부도 파산 등 공사대금 미지급으로 손해발생 시 공제금을 지급받는 상품이다. 수급인이 민간공사 도급계약에 따라 발주처로부터 받은 공사대금채권에 대해 공제에 가입하고, 향후 발주처가 대금을 지급하지 않아 손해가 발생하는 경우 공제금을 지급하는 방식이다.
전문가들 역시 건설업 관련 보증 및 공제를 전문적으로 취급하기 위해 공제조합의 매출채권보험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한다.
엄근용 건산연 부연구위원은 "건설업의 경우 다른 산업에 비해 총자산에서 매출채권(외상매출금·어음)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고, 매출채권 회전율이 낮아 대손 발생 위험과 영업비중 증가 등으로 경영상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크다"며 "중소기업 종합건설업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민간 공사에서 발주자의 대금 미지급으로 인한 피해가 여전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지급보증제도가 존재하지만 실효성이 없다"고 지적했다.
엄 위원은 "수급인 스스로 발주자의 대금 미지급으로 인한 피해를 해소하기 위한 매출채권보험이 존재하지만 건설업에는 실질적으로 공급이 잘 이뤄지지 않는 상황"이라며 "건설업에서 발생하는 발주자의 대금 미지급 문제를 해소하면서 중소 건설사들의 성장 사다리 역할을 할 수 있는 건설공제조합의 매출채권공제 상품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sky0322@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