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추상미술 선구자...이중섭 친구·윤형근 화백 장인
종일 작업 몰두 1000여점 남겨...뉴욕시절 전면점화 인기
뉴시스, 국내 언론 최초 작품가격 사이트 'K-Artprice' 오픈
2015~2019 상반기까지 2만2400점 국내경매 낙찰가 공개
【서울=뉴시스】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21세기 한국미술시장 ‘황제주’로 등극한 김환기(1913~1974)가 살아있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는 64년전인 1955년 3월, 이렇게 말했었다.
"나는 그림을 팔지 않기로 했다. 팔리지가 않으니까 안 팔기로 했을지도 모르나 어쨌든 안 팔기로 작정했다."
그는 "그림을 팔지 않기로 작정한 다음부터는 마음이 편안하다"면서 "혹시 전람회장에서나 그 밖의 어느 기회에 내 그림의 가격을 물어 보는 사람이 있을 때는 '그 그림은 안 팝니다' 이렇게 똑똑히 대답하는 것이, 또 대답하고 나서 내 마음은 어찌나 통쾌한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림을 안판다'고 말한 것을 통쾌한 일로 여겼던 김환기였다. 그런데 이젠 '안팔수 없는 그림'이 됐다. 매월 경매때마다 그의 그림이 출품된다.
김환기의 작품은 지난 5년간 580점이 경매에 올라 453점이 팔린 것으로 나타났다. 2015년부터 2019년 상반기까지 5년간 김환기 작품은 약 1413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이는 서울옥션·케이옥션등 국내 미술품경매사 10여곳에서 거래한 낙찰가를 분석한 결과다. 이 같은 내용은 뉴시스가 국내 언론 최초로 개발한 작품가격 사이트인 'K-Artprice(k-artprice.newsis.com)'에서 확인할 수 있다.
수십억대로 치솟는 그림값 속에 타이밍을 노리는 '우량주'는 여전히 숨어있다. 좋은 작품은 아직 안나왔다는 이야기다.
대한민국 미술시장을 이끌고 있는 김환기는 누구일까?
큰 키에 선비같은 모습, 멋쟁이 화가였다. 최순우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수화 김환기 형이 기세했다는 전갈을 듣는 순간에도 나는 '멋'이 죽었구나, '멋쟁이'가 갔구나 하는 허전한 생각을 먼저 했었다"면서 "그의 껑청거림이나 음정이 약간 높은 웃음소리나 말소리의 억양도 멋의 소산이라고 할 만큼 그는 한국의 멋으로만 투철하게 60평생을 살아나간 사람"이라고 회고한 바 있다.
우리나라 대표 그림으로, 대한민국 미술문화 국격을 높이고 있는 김환기는 그러나 한국에 없다.
그는 미국 뉴욕 맨해튼 북쪽 외곽에 있는 묘지에 이름만 남아 참배객을 맞는다. 그 옆에는 2004년 3월 그를 따라간 부인 김향안(1916∼2004) 여사도 나란히 묻혀 있다. 김향안은 시인 이상의 부인이었다 이혼하고, 김환기와 재혼했다. 아낌없는 내조를 펼쳤던 김향안은 김환기가 세상을 떠난후 김환기 예술의 가치와 영향력을 보존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1978년 국내 처음으로 공익재단인 환기재단을 설립했고, 환기미술관을 지었다. 지금의 '김환기 시대'를 맞게한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이다.
1974년 7월 25일 한국추상미술의 선구자 수화(樹話) 김환기는 뇌일혈로 별세했다. 그 해 7월 7일에 입원하고 수술을 받았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뉴욕의 한 병원에서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1913년 2월 27일 전남 신안 섬에서 태어난 수화 김환기는 '화생화사(畵生畵死.그림에 살고 그림에 죽는)' 떠돌이 인생이었다. 외국에서 삶을 살았지만 한국적 예술혼을 놓지 않았다.
부농 김상현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잠시 서울 중동 중학에 진학하기도 했으나 1931년에 일본에 가 도쿄의 니시키시로 중학을 다녔고 1933년부터 1936년까지 일본대학 예술학원 미술학부에 들어가 졸업했다.
일본, 프랑스, 미국 등 해외에서 두루 활 동을 하며 한국 근현대 미술의 국제화를 이끌었다. 1963년 상파울루비엔날레에 한국에서 처음 참가한 작가다. 이때 출품한 작품으로 한국인 최초 명예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베니스비엔날레, 휘트니비엔날레와 함께 세계 3대 비엔날레로 꼽히는 상파울루비엔날레를 경험한 김환기는 한국에 돌아오지 않는다. 1956년부터 1959년까지 프랑스 파리에서 살았다. 일제강점기, 광복, 6·25전쟁 등 어려운 시대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21회의 개인전을 가지며 예술혼을 불태웠다.
1959년 귀국해 한국미술협회 이사장과 홍익대 미대 학장으로 화단권력의 중심부에 있었다. 그러나 김환기는 과감했다. 하늘의 명을 깨닫는다는(知天命) 50의 나이에 한국에서 쌓아온 모든 지위와 풍요와 안정을 버리고 뉴욕으로 갔다. 이곳에서 작고할 때까지 11년 동안 단색조 화면에 같은 단위 점을 반복적으로 찍어 표현하는 점화를 그렸다.
김환기는 '이중섭의 친구'로도 유명하다. 이중섭,장욱진, 백영수, 유영국과 함께 '신사실파'를 결성한 '모더니스트'였다. 조형적으로 아카데미즘을 거부하고 전통적인 요소의 현대적 번안을 연구한 작가로 국내 화단에서 초창기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꼽힌다. 또한 단색화 열풍 멤버인 윤형근(1928~2007)화백의 장인으로, 김환기의 장녀 김영숙과 결혼했다. 서울대 스승과 제자로 만나, 사위와 장인 사이가 되었지만, 윤형근은 장인이 아니라 평생 '아버지'로 부르며 존경했다고 한다.
서양적 추상화의 기법을 사용하여 한국적 정서를 서정적 으로 표현한 그의 작품은 우리 미술의 정체성을 구현해 냈다고 평가 받는다.
특히 한국 현대미술에서 가장 많은 작품을 후대에 남긴 독보적인 존재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종일 작업에 몰두했다'고 알려진 김환기 화백이 남긴 작품은 현재 1000여점 이상으로 추정된다.
이중섭 화백(총 500여 점 이하 추정), 박수근 (유화 기준으로 200여 점, 총 1000여 점 이하로 추정)과 비교했을 때 압도적인 규모의 왕성한 작품 활동으로 한국 근현대미술사에서 추상 미술의 태동 을 읽을 수 있는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다.
현재 미술시장에서 초강세를 보이는 '전면점화'시리즈는 1967년부터 1973년까지 뉴욕시절에 제작됐다.
점화는 1970년 한국일보 주최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로 대상을 수상하면서 대중에 알려졌다. 전면추상회화로 도약한 작품으로 21세기 한국미술의 대표 작품으로 우뚝 선 그림. 그 작품은 뉴욕의 좁은 화실에서 김광섭의 시를 읊으며 점(點)을 찍었다고 한다.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 본다/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점화는 김환기의 열정적인 종이 매체 탐구로 나왔다. 수많은 종이 작업의 내공 속에서, 커다란 캔버스를 가득 메운 점화의 경건한 감동의 세계가 필연적으로 탄생된 것이다. 전면점화는 맑고 투명한 액체가 종이에 머금으며 마치 화면에서 서서히 새어 나오거나 뿜어나오는 듯 보이는 성질을 그대로 살린 기법이 특징으로, 해외 평론가들은 ‘전면 점화’를 '동양적 추상화'로 평가하고 있다.
1967년 뉴욕에서 김환기는 ‘종이’를 발견했다. 전면점화의 태동이다.
"1월 2일. Oil on Paper를 캔버스에 옮겨서 완성. 이 해의 첫 작품인 셈. 선(線)인가? 점(㸃)인가? 선보다는 점이 개성적인 것 같다. 1월 23일. 나는(飛) 점(㸃), 점들이 모여 형태를 상징하는 그런 것들을 시도하다. 이런 걸 계속해보자."
"2월 20일. 종일 Oil on Paper를 정리하니 꼭 90점이다. 내일 현대미술관에 가기 위해서다. 밤새 아트 인터내셔 널(Art International)과 스튜디오 인터내셔널(Studio International)을 뒤적이다. 예술도 역시 유행이다."(1968년 김환기의 일기 중에서)
"1968년대 뉴욕 타임스는 지질(紙質)이 오늘보다 훨씬 좋았다. 하두 종이가 좋아서 신문지에 유채를 시도한 김환기는 종이가 포함한 기름과 유채가 혼합되어 빛갈에 윤기가 돌고 꼭 다디미질한 것 과도 같은 텍스츄어가 나오는 것이 재미난다면서 한동안 종이에 유채작업에 몰두했다.
1967년 말에서 1968년 1,2,3개월동안, 하루에 평균 10여장씩의 작업을 계속했다. 수화는 그 중에서 몇 장을 골라서, 하얀 백지를 사다가 배접을 해서 유리틀에 끼어 보았다. 자기도 놀라게 우수한 작품이었다. 신문지 위에 작업을 충분히 시도하고는 종이에 유채를 한편에 차곡차곡 쌓아두고 다시 캔바스 위에 작업으로 돌아갔다. 지금 그 배접을 하다말고 그대로 둔 40점을 꺼내서, 종이 보관을 위한 과학적인 과정을 거쳐서 배접을 시켜, 유리틀에 끼다. 종이가 유리에 닿지 않도록 막음 틀을 사이에 끼어서 그림과 유리 사이를 뜨게 하다. 그림은 어제 그린 것처럼 싱싱한 아름다움을 발산한다."(
1990년 김향안 에세이중에서)
'지칠 줄 모르는 창작열'로 예술혼을 바친 김환기는 한국 미술사에서 별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이 시대, 왜 '김환기'일까.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그의 작품 앞에 서면 언제나 어제 그린 것을 보는 것만 같은 감동이 일어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나는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모든 명화는 현재형으로 다가온다"고.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한편 김환기의 2015년부터 2019년 상반기까지 5년간 낙찰된 453점의 작품 가격은 뉴시스가 국내 언론 최초로 개발한 작품가격 사이트인 'K-Artprice(k-artprice.newsis.com)'에서 확인할 수 있다.
'K-Artprice(k-artprice.newsis.com)'는 국내 경매사에서 활발하게 거래되는 국내외 주요작가 200명의 작품가격을 제공한다. 작가당 5년간 거래 이력이 담긴 2만2400점의 가격을 한 눈에 파악 할 수 있다.
#클릭☞ K-Artprice(k-artprice.newsis.com)
◎공감언론 뉴시스 hyun@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