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열단100주년]⑦항일음악가 정율성…中에서 '현대음악의 별'로 추앙

기사등록 2019/09/08 12:51:35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이후인 1919년 11월10일. 만주의 한 시골 마을에 신흥무관학교 출신 젊은이 13명이 모였다. 이들은 대한의 독립을 위해 항일 무장 투쟁을 벌이기로 뜻을 모아 조선의열단을 결성했다. 뉴시스는 프랑스 레지스탕스 활동에 비견되는 의열단의 창단 100주년을 맞아 '조선의열단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도움으로 의열단의 대표적 인물들을 매주 소개한다. 독립운동사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겼음에도 잊혀져만 가는 선인들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을 재조명해 본다.

【서울=뉴시스】민족음악가이자 혁명음악가 정율성 선생(1914~1976). 2019.09.08. (사진=조선의열단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제공)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김성진 기자 = "석양은 산 위 탑 그림자에 눈부시고 / 달빛은 강가 반딧불을 비추는구나 / 봄바람은 탁 트인 울타리를 쳤구나 / 아, 연안! 너 장엄하고 웅대한 고도여! / 뜨거운 피 네 가슴에 용솟음쳐라 / 천만 청년의 심장이여 / 적을 향한 증오를 묻어두고서 / 산과 들에 길게 길게 늘어서리라."

1938년 민족음악가 정율성(1914~1976)이 작곡한 옌안송(연안송) 일부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당시 전국 각지와 해외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이 노래를 듣고 중국 혁명의 '성지'로 불리는 옌안으로 몰려들었다. 그래서 옌안송을 혹자는 '혁명의 성가'로도 부른다.

중국에서는 '현대음악의 별'로 크게 추앙받는 선생은 일제강점기 중국으로 망명해 항일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자 의열단원, 민족음악가, 혁명음악가다. '유격전가', '처녀 적녀성', '조선의용군 행진곡', '옌안송', '팔로군 행진곡'(중국인민해방군가) 등 항일성이 짙은 노래를 다수 작곡해 대단한 명성을 얻었다.

특히 선생이 작곡한 '중국인민해방군가'는 전투적 정신과 기상을 행진곡풍으로 표현한 곡으로 중화인민공화국(중국) 건립 이후에도 계속 군가로 불리다가 1988년 7월25일 중국 중앙군사위원회로부터 정식 비준을 받았다. 지금까지도 중국인들의 일상 생활에 널리 사용되고 있으며, 지난 2015년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열린 중국 전승절 70주년 기념 대규모 열병식 행사에서도 울려퍼졌다.

선생의 항일음악 역사는 독립운동을 하던 가족의 영향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14년 전라남도 광주에서 태어난 선생(어릴 때 이름은 정부은)은 어릴 때부터 독립운동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첫째 형 정남근과 둘째 형 정인제, 셋째 형 정의은 등이 모두 독립운동가로 활약했기 때문이다.

1917년 부친을 따라 광주에서 화순 능주으로 이주했고 1922년 능주 공립 보통학교에 입학했다. 1924년 다시 광주로 돌아와 숭일 소학교에 입학해 1928년 졸업했다. 이듬해인 1929년 3월 전주 신흥중학교에 입학했고 합창단에 들어가 '내고향', '쪼각달', '고기잡이', '까투리타령' 등의 노래를 지도했다.

【광주=뉴시스】정율성 선생 모습. 2018.11.21. (사진=광주시립오페라단 제공) photo@newsis.com
1933년 봄 셋째 형 정의은(조선공산당 당원), 누나 정봉은과 함께 중국 난징(南京)으로 망명해 의열단이 세운 조선혁명간부학교 제2기생(1933년9월~1934년4월)으로 졸업했다. 입학 당시 최연소 학생이었다. 의열단에서 부여한 비밀 공작으로 난징의 고루(鼓樓) 전화국에서 일본군의 정보를 수집하는 활동을 했다.

또 김원봉·김규식 등이 조직한 민족혁명당의 당무를 보는 한편, 신분 은폐를 겸해 상하이를 오가며 소련 레닌그라드음악원 출신 여교수 크리노와(Krenowa)에게 성악, 작곡, 피아노, 바이올린 등을 배웠고 지금의 이름인 율성(律成)으로 개명했다.

항일구국운동이 한창이던 1936년 5월, 난징에서 중국의 좌파 청년들이 참여하던 '오월문예사(五月文藝社)' 창립 대회에서 '오월의 노래'(五月之歌)을 연주했으며 상하이(上海)에서 김성숙, 박건웅 등이 설립한 조선민족해방동맹에 참여했다.

의열단원이었던 김성숙과 그의 부인 두군혜의 지원을 받으며 중일전쟁 발발 후인 1937년 10월에는 남경을 떠나 중국공산당의 본부가 있는 옌안에 정착했다. 옌안에서 섬북공학(陝北公學)에 다니고, 1938년 5월부터는 노신예술학원(魯迅藝術學院) 음악학부에서 수학했다.

이후 항일군정대학 정치부 선전과에서 활동했으며, 1939년 1월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문예오락 분야의 책임을 맡았으며 그해 12월부터 노신예술학원 성악학부에 배치돼 교편생활을 했다. 이 시기 '옌안송', '팔로군 대합창' 등을 작곡했다. 특히 '팔로군 대합창' 8곡 중 '팔로군 행진곡'은 당시 팔로군에서 널리 애창됐으며, 이후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과 함께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로 채택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옌안에서 중국공산당에 소속돼 활동하던 중국 인텔리 여성 정설송(丁雪松·딩쉐송)을 만나 1941년 팔로군이 주둔하던 한 동굴에서 결혼했다. 정설송은 항일운동가로 국무원 외사판공실 비서장, 대외우호협회 부회장을 거쳐 중국정부 수립 후 네덜란드와 덴마크 주재 대사를 지낸 초대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양녀이기도 하다.

【광주=뉴시스】정율성 선생의 대표 오페라 '망부운'의 1962년 5월12일 초연 모습. 2018.11.21. (사진=광주시립오페라단 제공) photo@newsis.com
음악을 작곡하는 한편 1941년 7월부터는 화북조선청년연합회 섬감녕분회(華北朝鮮靑年聯合會陝甘寧分會), 이듬해 12월부터 태행산(太行山)의 화북조선혁명청년학교(華北朝鮮革命靑年學校) 등에 소속돼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음악장으로서 '유격전가', '처녀 적녀성', '조선의용군 행진곡' 등 항일성이 짙은 노래를 작곡하여 명성을 얻었다. 1944년 4월 다시 옌안으로 들어간 뒤 그곳에서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 후 북한으로 귀국, 1946년 황해도 해주에서 황해도당위원회 선전부장으로 활동했다. 이때도 음악전문학교를 설립하고 음악 인재를 양성했다. 1947년 평양으로 옮겨 조선인민군 구락부의 부장을 지냈고, 인민군협주단을 창설해 단장이 됐다. 북한에서 '조선인민유격대전가', '조선인민군 행잔가' 등을 창착해 중국과 북한 두 각가 군가를 작곡한 최초 음악가로 기록됐다.

1950년 9월 중국으로 갔다가 같은 해 12월 중국인민지원군으로 북한으로 돌아와 전선 위문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1951년 김일성의 옌안파 숙청과 관련해 불안을 느끼고 저우언라이의 도움을 받아 주국으로 돌아와 중국 국적을 얻고 1976년 12월7월 베이징에서 고혈압으로 사망할 때까지 작곡가로서 음악활동에 열중하며 많은 작품을 남겼다.

옌안에 있을 때 작곡한 '옌안송'과 '팔로군행진곡' 이외에도 가요 '해방행진곡', 3·1행진곡, 대합창 '두만강', '동해어부', '평화의 합창' 등을 작곡했고, 가극 '망부운'(望夫云), '설란', 동요 '우리는 행복해요', '푸르른 조국', 대중가요 '흥안령에 눈꽃 날린다', '철도로동자의 노래' 등 작품 360여 편을 창작했다.

사후 1978년 북경출판사에서 '정률성가곡선'이 출판됐으며, 2009년에는 중국 정부의 '중국 창건 영웅 100인'에 선정됐다.

그의 고향인 광주광역시에서는 매년 정율성음악축제를 개최하고 그의 음악을 소개하고 있다.


ksj87@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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