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파리로 도불, 존 케이지 등과 교류
예술, 철학, 과학 접목된 실험적 작업 펼쳐
강승완 실장 "한국미술사 정립 꼭 필요한 작가"
【서울=뉴시스】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잘 보기 위하여
잘 읽기 위하여
잘 생각하기 위하여
잘 하기 위하여
안경을 쓸 필요가 없다
생각도 그림도 다 아니다
보이는 것도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다
보이지 않는 것도 보이는 것도 이다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는 것은
안에 있는 것도 아니오
밖에 있는 것도 아니오
이쪽도 저쪽도 아니다
그냥 그것이다 그냥 게으른 구름이다
그냥 노닐다가
그냥 모습, 그냥 색깔, 그냥 소리' (김순기 게으른 구름(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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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과천 연못앞에서 붕어를 보고 있을때 였다. "웬일이세요? 놀러오셨어요?" 대학 은사 김윤수 교수도 반색했다. "미술관에 무슨일로 왔냐"고 묻는 은사에게 "큐레이터 강 뭐시기를 만나러 왔는데 이름이 생각이 안난다"고 하자, 은사가 "아, 강승완 큐레이터"라고 했고 그제서야 전화속에서 말하던 그 이름이 떠올랐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 은사(김윤수)는 미술관 관장이었다.
2000년대 초반 프랑스 파리에서 잠깐 서울에 온 그는 국내 미술계를 잘 몰랐다. 그 해 아트선재센터에서 '주식거래 II'로 개인전을 열기도 했지만 서울을 오래 떠나 있었다.(서울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1971년 프랑스 정부 초대로 파리 니스로 도불한 후 그 곳에서 38년간 교수로 활동했다.)
서울에 온 건 집안이 풍비박산 나던 시기였다. 집안 가구에 빨간 딱지가 붙어있고 빚독촉 전화가 이어졌다. 그 전화를 피하던 어느 날 받은 전화는 '구원'이었다. "국립현대미술관 강승완 큐레이터인데 작품을 구입하겠다"는 전화였다.
'주식거래' 작품이 미술관에 소장되면서 덕분에 빚을 조금 갚았고, 강승완 큐레이터와 우연한 인연이 이어졌다.
김순기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1971년 프랑스 정부 초대로 파리 니스로 도불했다. 어린시절부터 현대미술의 중심지인 파리로 가겠다고 키웠던 꿈이 이루어진 때다.
1986년 우연히 미국 전위 음악가 존 케이지(1912~1992)를 만나면서 예술 활동이 업그레이드 됐다. 인위적인 행위를 최대한 지양하는 김순기의 작업과 자연 그대로의 소리에 귀를 열게 했던 존 케이지의 예술관이 깊이 공명하면서 비디오와 멀티미디어의 세계를 확장했다.
존 케이지의 소개로 뉴욕에 살던 미디어아티스트 백남준을 만나 같이 활동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비디오아트를 하는 백남준 영향을 받은 것 아니냐고 하지만, 김순기는 강력하게 저항한다. "백남준때문에 비디오를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1971년부터 프랑스 니스와 모나코에서 관객과 실시간 연결되는 비디오와 퍼포먼스 작품을 해왔고, 그런 작업이 이어져 1983년 파리에서 백남준과 퍼포먼스를 펼쳤다.
김순기는 "백남준의 '비디오는 비빔밥', '비디오는 색동'이라는 말을 백남준과 대담하면서 한 말"이라면서 '여자 백남준'이라는 시선을 거부했다.실제로 그를 비디오아티스트로만 규정하기는 쉽지 않다.
#3년전, 강승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이 유럽 출장중 김순기 작업실을 찾았다. 파리 시골 농가를 개조한 작업실이었다.
강승완 실장은 "그때 미디어 회화 드로잉등이 모두 따로 분류된 4~5곳 작업실 공간에서 놀라운 경험을 했다"고 했다.
"20여년간 알아왔는데 못 본 작품이 너무 많았고, 꼭 미술관에서 제대로 보여줘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동안 알고 있었던 건 빙산의 일각이다. 한국에서 제대로 전시를 해야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창고를 뒤져 모든 작품을 정리해 2년간 준비를 마쳤다.
재불 작가 김순기(73) 회고전같은 개인전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31일 개막한다.
29일 미술관에서 만난 김순기 작가는 "성격도 다르고 다양한 작품을 전시하기 위해 미술관 학예팀이 고생 많이 했다"며 전시 소감을 대신했다.
실제로 6전시실, 7전시실은 다채롭고 수많은 작품들로 어지러울 정도다. 1998년 쓴 시(時) '게으른 구름'을 타이틀로 영상, 설치, 드로잉, 회화, 로봇까지 총 200점이 전시됐다.
'김순기 게으른 구름'을 작가가 직접 쓴 붓 글씨를 세로로 크게 써 전시장 문 앞에 달았다. 길쭉하고 날카로운 글자는 작가의 모습과 꼭 닮았다.
국내 화가라면, 작가라는 타이틀이 붙었다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인전은 최고의 영예다. 단색화 거장 박서보(88)화백도 지난 5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생애 첫 개인전을 열고 감개무량했다.
이런측면에서 '김순기 개인전'은 이례적이다. 파리에서 작업하며 활동한 탓에 국내에는 유명세가 없는 작가이자, 그동안 해외 유명 작가 전시를 해오던 미술관의 파격 대우로 보인다.
김순기 작가는 "강승완이 나를 발견했다"고 말했다.
강승완 실장은 "국립현대미술관은 작가들을 통해 미술사를 정립하는데 의미가 있다"면서 "국내 미술사에서 구멍이 나 있는 부분, 그것을 제대로 메우는 역할을 한다. 특히 여성작가들에 대한 연구가 안되어 있다. 한국미술사를 정립하는데 김순기가 필요했다"고 전시 배경을 설명했다.
그러면서 "50년동안 외지에 계셨지만 한국적인 철학이나 생각이 항상 있었다. 김순기의 작품 세계를 통해 여성 설치미술 비디오아트작가로서 추구해온 한국미술을 새롭게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소개했다.
김순기 작가는 "작업실에 박혀있던 스케치와 드로잉을 전시장에 펼쳐놓고 보니 어릴때부터 동양사상에 취해온 흐름이 보여 나도 몰랐던 인식을 할수 있어 새롭다"고 했다. 다양한 장르의 작품은 "하나를 잘하는 것을 반복하기 보다 잘 모르는 것, 새로운 것을 해보고 싶다"는 도전 의식이 작용했다.
이수정 학예연구사는 "1980년대부터 파리 교외 비엘 메종(Viels-maisons)의 농가를 개조한 작업실에 거주하면서 동·서양의 철학, 시간과 공간 개념에 관한 탐구를 바탕으로 영상, 설치, 드로잉, 회화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정형화될 수 없는 예술과 삶의 관계를 고찰해왔다"면서 "프랑스에 살았지만 동양의 전통을 살리고 있는 작가로 평소 작업을 하지 않는 순간이 없을 정도로 예술을 삶에서 녹아내는 작가의 작업을 통해 예술이 매일 각자의 순간을 풍요롭게 만는 삶의 일부임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우연히 만난 큐레이터와의 인연의 고리는 김순기 작업세계와도 맞닿아있다. '도는 똥과 오줌속에도 있다'는 글귀를 써 전시한 그의 작품은 ‘작위’를 지양한다. '게으른 구름'의 시 처럼 '그냥 그것', 사물과 풍경의 원래 모습을 담으려고 했다.
돌멩이에 글씨를 쓰고, 화선지에 붓으로 삐뚤빼툴 쓴 '바보 서예'도 선보인다. 전혀 쓸모없는 것처럼 보이는 '무용'이야말로 정말로 '유용'하다는 장자 철학이 엿보인다. 전시는 2020년 1월 27일까지.
한편 오는 9월 8일 전시마당에서 무당 김미화, 로봇 영희와 함께 신작 사운드 퍼포먼스를 진행된다. 2019년 현재의 시간과 공간을 고찰한 신작 퍼포먼스 '시간과 공간 2019'를 선보인다. 입력된 명령만 수행하는 로봇과 초자연적인 존재로서 무당이 등장해 게으르고 심심해하는 로봇 ‘영희’가 시를 읊고 무당 김미화의 굿하는 소리, 전시마당 내 설치된 다양한 기구들이 내는 소리가 서울관을 점령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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