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강박 털어낸 한국발레 '호이랑'

기사등록 2019/05/18 13:44:27

칼·활 든 진취적 발레리나

발레 '호이 랑' ⓒ국립발레단·BAKi
【여수=뉴시스】이재훈 기자 = 발레에 입문하고 싶거나, 동화를 춤으로 느끼고 싶다는 관객에게 이제 추천할 작품이 생겼다. 국립발레단 신작 드라마 발레 '호이 랑'을 보면 된다. 17, 18일 전남 여수 GS칼텍스 예울마루 대극장에서 초연한 '호이랑'은 잘 빠진 '엔터테인먼트적 발레'였다.

조선시대 홀아비와 살던 효녀로, 늙은 아버지를 대신해 군역을 맡는 '부랑'의 이야기가 바탕이다. 따로 설명을 접하지 않아도, 춤과 음악만으로 드라마의 기승전결이 머리와 마음에 자연스럽게 파고든다.

'뮬란'을 연상케 하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한국적 변형으로도 볼 수 있다. 좋지만 빤한 이야기를 한국식으로 잘 포장해서 변주한 것이 아니냐고? 그런 단순한 생각은 경계한다.

세계적인 이야기의 변형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대본을 쓴 한아름(42) 작가는 효 등 우리의 원형에서 이야기를 길어내 차별화를 꾀했다. 그로테스크한 연출법으로 자신만의 인장이 분명했던 서재형(49) 연출의 따듯한 시선이 더해지니, 금상첨화다. 

무엇보다 새로운 발레의 풍경을 만들어 낸 데는 안무가인 국립발레단 솔리스트 강효형(31)의 공이 크다. 칼과 활을 든 주역 발레리나, 발레리나 군무가 아닌 발레리노들의 역동적인 군무, 정치용 감독이 이끄는 80인조 코리안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박진감 넘치거나 섬세한 연주가 더해지면서 인상적인 그림을 만들어냈다.

브람스, 홀스트, 차이콥스키 등 강효형이 직접 선곡한 클래식음악들은 동양적인 이야기에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며 이야기와 약동하는 리듬과 정서를 부여했다. 지역 공연장에서 80인 오케스트라의 라이브 음악이 함께 하는 것은 이례적이다.

GS칼텍스 예울마루 대극장은 이를 받아들이기 위해 무대를 넓혔다. 덕분에 무대를 보호하는 성벽처럼 무대 앞에 전진 배치된 오케스트라의 사운드는 입체적이었다. 갑옷 같이 공연에 외피를 둘렀고, 덕분에 이야기는 동화처럼 술술 넘어갔다.

멀건 기대에 휩싸였던 초연은 실체를 드러내니 제 빛을 냈고, 쨍한 것들로 가득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에, 공연장을 가득 채운 남녀노소 누구도 지루해하는 이가 없었다. 첫 전막 발레 '허난설헌-수월경화'에 이어 강효형은 소포모어 징크스를 깼다.

쉴 새 없이 무대를 누빈 무용수들도 기억해야 한다. 첫날 '랑' 역으로 나선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박슬기는 드라마를 머금은 연기력은 말할 것도 없고, 발레리노 이상으로 스태미나를 뽐낸 뒤 공연이 끝나고 싱긋 웃었다.

발레리나와 발레리노는 저마다 소화할 수 있는 영역이 다르다. 차별이 아니다. 태생적인 신체적 조건에 의한 차이점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20명가량의 발레리노 군무진에 둘러싸여 그들과 똑같은 스텝과 동작으로 춤을 추고, 그 가운데서 자신의 선을 살려 리듬을 꾀하는 박슬기의 기술과 표현력에 감탄이 나왔다.

발레리나가 남성 군무진을 이끄는 풍경도, 한국 발레 작품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의미있는 정경이었다. 기본기와 기초 체력을 다지기 위해 그녀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였을지 짐작하기도 힘들었다. 두 번째 날 랑 역은 국립발레단 또 다른 수석무용수 신승원이 맡았다.

강수진(52) 국립발레단 단장 겸 예술감독은 '호이랑'이 발레계 대표적인 연말 레퍼토리 '호두까기 인형'처럼 되기를 바랐다. '호이랑'은 한국적 발레 강박을 털어냈는데, 한국 발레의 미래를 보여줬다. 사명감은 꼭 의미심장하고 비장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잘 만들어진 한국 발레의 또 다른 속살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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