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하이힐을 신는 남자들…"드랙, 정체성 표현 수단"

기사등록 2019/05/12 13:00:00

서울 드랙 퍼레이드 개최…올해 600여명 참가

"있는 그대로의 나를 표현하는 것이 바로 드랙"

다른 성 표현하는 '성별 반전' 필수적? "아니야"

"정체성 표현하는 인권운동으로 다루고 싶어"

【서울=뉴시스】이영환 기자 = 서울 드랙퍼레이드 조직위원장 히지 양(Heezy Yang)과 조직위원 알리 자후(Ali Zahoor)가 8일 오후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뉴시스와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19.05.12. 20hwan@newsis.com
【서울=뉴시스】안채원 기자 = 지난 5일 대낮의 서울 용산구 이태원 일대. 200여명의 사람들이 줄을 지어 행진을 했다. 무지개 깃발을 든 채였다. 짙은 색조화장과 화려한 복장을 한 이들이 유독 눈에 띄었다. '서울 드랙(Drag) 퍼레이드'에 참가한 이들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드랙'이란 말은 여전히 생소하다. 한번쯤 드랙을 들어본 이들도 대부분 뮤지컬 '헤드윅'이나 '킹키부츠'를 떠올린다. 과한 화장과 옷을 입고 여성의 흉내를 내는 남성 성소수자의 모습이다. 일부는 '여성이 되고 싶은 남성'이나 트랜스젠더들이 아니냐고 오해한다.

여기, 드랙을 더 많은 대중에게 더 정확히 소개하려는 이들이 있다. 서울 드랙 퍼레이드를 기획해온 히지 양(Heezy Yang·29)과 알리 자후(Ali Zahoor·25)씨가 그들이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드랙이라고 말하는 이들을 지난 8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서울=뉴시스】지난 5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 일대에서 제2회 서울 드랙퍼레이드가 열리고 있는 모습. 퍼레이드를 기획한 알리 자후(왼쪽)와 히지양이 손팻말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2019.05.09. (사진 = Argus Paul 제공)
지난 3일부터 5일까지 총 3일간 열린 제2회 서울 드랙 퍼레이드엔 600여명이 참석했다. 지난해 처음 개최한 드랙 퍼레이드는 성 소수자 문화의 서브컬쳐(하위문화)인 '드랙'을 제대로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에서 시작한 행사였다.

"퀴어 퍼레이드(2000년부터 매해 열리고 있는 한국 성소수자들의 권리증진을 위해 기획된 행사)에서도 드랙 공연을 하는데, 대부분 남자가 여장을 하는, 그런 모습으로 비춰져요. 그런데 드랙에는 더 다양한 종류가 있거든요. 그걸 보여주고 싶었어요."(알리)

성소수자들의 문화로 시작했지만, 꼭 성소수자만이 드랙을 하는 건 아니다. 히지 양은 드랙을 "게이든 레즈비언이든, 성소수자든 아니든, 한 개인이 자신의 성 정체성이나 원하는 스타일을 의상이나 화장 등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누구든 드랙을 함으로써 사회가 일반적으로 규정한 남성성이나 여성성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나'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회가 여성에게 기대하는 일종의 모습들이 있잖아요. 긴 머리에 매끈한 피부 같은 것들이요. 그런 것에서 벗어나 숏컷을 하고 제모를 안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그것도 일종의 드랙이라고 볼 수 있는 거죠."(히지 양)

다른 성을 표현하는 '성별 반전'이 필수적인 것도 아니다.

"한국이 아직 보수적인 사회잖아요. 여성들이 노출이 있는 과감한 옷을 입음으로써 나를 표현하고 싶은데 사회적 시선 때문에 망설이는 경우도 있죠. 남들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고 나를 표현하는 것도 드랙이라고 할 수 있어요."(알리)
【서울=뉴시스】히지 양이 평소 무대에서 드랙 아티스트 '허리케인 김치'로 공연을 펼치는 모습. 2019.05.09. (사진 = Argus Paul 제공)
금요일이나 주말 밤, 이태원의 클럽이나 바(bar) 등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드랙쇼'를 대낮의 '퍼레이드'로 기획한 것도 드랙의 의미를 넓히고 싶어서였다.

"드랙을 일종의 유흥이나 엔터테인먼트가 아니라, 자신을 알아가는 하나의 수단으로, 정체성을 표현하는 인권운동으로서 다루고 싶었어요."(히지 양)

히지 양은 '허리케인 김치'라는 이름의 드랙 아티스트로도 활동 중이다. 클럽에서, 때로는 거리에서 무대에 오른다. 호기심으로 시작한 드랙은 이제 삶의 한 부분이 됐다.

히지 양은 "드랙을 통해서 어떤 해방감을 맛본 것 같다"며 "드랙을 통해 나를 표현하는 자유에 빠져버렸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Forbes)가 발표한 '2018 아시아의 영향력 있는 30세 이하 리더 30인(30 Under 30 Asia)'에도 이름을 올렸다. 한국 성소수자 문화 전반에 기여했다는 활동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셈이다.
【서울=뉴시스】이영환 기자 = 히지 양과 알리는 더많은 사람들이 드랙을 시도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2019.05.12. 20hwan@newsis.com
히지 양과 알리는 더 많은 사람들이 드랙에 관심을 가지고 시도해봤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성소수자든 아니든, 드랙을 자기표현의 수단으로서 관심을 가져보면 어떨까요."(히지 양)

"나이나 성별, 인종과 젠더에 상관없이 누구나 드랙을 할 수 있습니다. 드랙은 모두를 위한 거니까요."(알리)

올해 드랙 퍼레이드는 끝이 났지만 가까운 시일에 드랙을 한 이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아직 있다. 오는 6월1일 서울 퀴어퍼레이드에서는 드랙 아티스트들로 이뤄진 퍼레이드 차량이 행진한다. 전날 오후 5시부터 서울광장에서 열리는 '핑크닷' 행사에서는 히지 양 등이 주축이 된 드랙쇼가 예정돼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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