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에 따르면 황해북도 개풍군 영남면 용흥리에 있던 태묘는 송나라 제도를 참고해 992년 12월 건립됐다. 제1실에는 태조와 태조비의 신주가 봉안됐다고 전해내려 온다.
굽 안쪽 바닥면에 돌아가며 '순화 4년 계사년 태묘 제1실 향기로서 장인 최길회가 만들었다(淳化四年 癸巳 太廟第一室 享器 匠崔吉會 造)'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 명문을 통해 장인 최길회가 993년 태묘 제1실의 향기로 쓰려고 이 항아리를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문양 없이 긴 이 항아리의 입구는 넓고 곧게 서 있다. 몸체에서 어깨 부분은 약간 넓은 유선형이다. 표면에 미세한 거품이 있으나, 치밀한 유백색 점토를 사용해 바탕흙 품질이 좋다. 표면에는 은은한 광택과 함께 미세하게 갈라진 금이 있다. 군데군데 긁힌 자국이 이 항아리가 사용됐다는 흔적으로 보인다.
이러한 특징은 1989~90년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가 황해남도 배천군 원산리 2호 가마터에서 발굴한 순화 3년명 고배(淳化三年'銘 高杯)를 비롯해 여러 파편에서도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이 항아리도 원산리 가마터에서 제작돼 태묘의 제기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향후 북한 청자 가마터와 비교연구를 통해 우리나라 청자 생산 기원을 명확하게 종합적으로 확인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 항아리는 1910년께 처음 공개됐으나 발굴경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일본인 소장가들을 거친 이 항아리를 1957년 이화여대가 사서 전해지고 있다.
그래도 이 항아리는 현전하는 초기청자 가운데에서 드물게 큰 항아리로 바탕흙 품질이 우수하고 형태가 비슷한 사례가 없는 유일한 작품이라는 점, 굽 안쪽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제작연도·기명의 용도와 사용처·제작자를 확실히 알 수 있다는 점, 황해남도 원산리 가마터에서 발굴된 순화명(淳化'銘) 파편들과 비교해 고려 왕실 제기 생산 가마터를 비롯해 다양한 제작여건이 추가로 밝혀짐으로써, 초기청자를 대표하는 유일한 편년자료로서 한국 청자 발달사를 밝히는데 필수적 유물이라는 점에서 역사·학술·예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
군위 인각사 출토 공양구 일괄은 2008년 경상북도 군위군에 있는 사찰인 인각사의 1호 건물지 동쪽 유구에서 발견된 유물이다. 금속공예품과 도자류 총 18점으로 구성된 일괄 출토품이다. 제작 시기는 통일신라에서 고려 초기로 추정된다.
지금까지 신라 말에서 고려 초 금속공예품 대부분이 사찰이나 박물관 등지에서 전해 내려왔지만, 인각사 출토 공양구는 드물게 온전히 땅속에서 나온 유물이다. 비교적 이른 시기의 보기 드문 금속 기명과 청자 유물들이 일괄 출토돼 명확한 출토지와 편년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학술적 가치가 높다.
총 72권으로 편찬된 이 책에 대해서는 그동안 고려의 전래 기록과 실례가 증명되지 않았으나, 신간유편역거삼장문선대책 권5~6이 알려짐에 따라 고려 시대에 유입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됐다.
고려본은 판심의 규격이 조선본과 다르고, 경의(敬意) 처리법 적용과 권차(卷次; 고려본의 '壬'을 조선본은 '任'으로 오기)나 편자(編者; 고려본의 '安成'을 조선본은 '成案'으로 도치)의 표기에서 조선본보다 앞선 시기의 특징을 보인다.
'직지심체요절'은 정확한 간행연대를 가진 현존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이다. 이 고려본은 인쇄 시기 관련 기록은 없으나 고려 말 금속활자의 특징을 보여줘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 금속활자본 변화상 연구에 중요한 자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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