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정백년]②'아메리칸 드림' 버리고 독립 꿈꾼 조선인

기사등록 2019/04/11 05:30:00

"더 나은 삶 찾자"…1903년 하와이로 간 조선인

매질·학대 등 노예생활에도 귀국 향한 꿈 키워

1910년 귀국의 꿈 좌절…"독립운동만이 살 길"

일당 5센트, 한 푼 두 푼 모아 임정 수립 지원

상해 임정 활동의 든든한 후원자로 자리매김

【서울=뉴시스】 김태겸 기자 = 지난 2월 12일 상해 임시정부 100주년 취재차 갔던 미 서부 중가주 다뉴바시에서 만난 한인역사연구회 차만자 박사(캘리포니아 주립대 정치학과 명예교수)가 한인 이주노동자들의 기록물이 전시돼 있는 투라레카운티 박물관(Tulare County Museum)을 안내하고 있다.2019.04.10. patk21@newsis.com
【캘리포니아=뉴시스】김태겸 박종우 기자 = 1901년 함경도 지역에서 극심한 가뭄과 식량난이 겹치자 사람들은 먹을 것을 찾아 만주와 한양, 인천, 원산 등 대도시로 몰려들었다. 그 중 상당수가 미국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로 집단 이주했다.

이들의 이주를 추진한 사람은 미국 총영사·대리 공사였던 알렌(Alan)이다. 선교사이자 의사인 알렌은 갑신정변 때 부상당한 명성황후의 조카인 민영익을 치료해 고종과 친분이 두터웠다.

알렌은 고종에게 "조선인들을 하와이로 이민을 보내 돈을 벌게 해달라"며 "하와이에 가면 일당도 조선의 8배 이상 높고 날씨도 좋아 천국과 같은 생활을 할 수 있다"고 설득한 것으로 전해진다.

알렌이 조선인을 하와이로 집단 이주를 추진한 이유는 앞서 고용한 중국과 일본의 노동자들이 농장주와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알렌의 설득으로 1902년 하와이의 사탕수수 재배자협회 회장과 대한제국 정부는 이민협정을 체결한다. 고종의 하와이 집단 이주를 결정한 이유는 중국인과 일본인이 노동자로 갈 수 없는 곳에 조선인이 들어갈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으로 해석된다.

고종은 수민원(綏民院· immigration office)이라는 이민귀화국을 급히 신설하고 민영환을 총재로 임명해 이주 노동자들에게 집조(執照·여권)를 발급하는 적극성을 보이기도 했다.

1903년 1월13일 102명의 이주 한인이 수민원이 발급한 최초의 집조를 가지고 인천에서 하와이로 향하는 증기선 갤릭호(S.S. Gaelic)에 몸을 싣는다.
【서울=뉴시스】 김태겸 기자 = 지난 2월 상해 임시정부 100주년 취재차 방문한 미 서부 중가주 리들리 버제스 호텔(Burgess Hotel)이다. 사진은 1920년대에 독립자금을 모으러 온 안창호와 이승만이 투숙한 리들리시의 버제스(Burgess)호텔이며, 현재도 이 호텔은 운영 중에 있고 1919년 임시정부 수립 당시의 독립투사들의 흔적을 고스란히 기록하는 소중한 유적지지만 호텔은 건물주에 의해 곧 철거될 위기에 처해지고 있어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1903~1905년 사이 고종은 수민원(綏民院. immigration office)이라는 이민귀화국을 신설하고 한인 노동자 약 7200여명을 미국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집단 이주 시켰다. 이 중 약 2000여명은 노동기간을 마치고 미국 본토인 샌프란시스코로 향한다. 그 중 일부는 탄광이나 은광으로 일부는 미 서부 중가주 리들리 다뉴바 과일 농장으로 향한다. 이들이 바로  상해 임시정부의 수립 자금의 상당분을 낸 500여명의 민초 독립운동가들이다. 2019.04.10. patk21@newsis.com
이로부터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하는 1905년까지 퇴역군인과 기독교인 등 다양한 사연을 가진 조선인들 약 7000여명이 하와이로 향했다.

이들은 '아메리칸 드림'을 가슴에 품고 호놀룰루 제2부두에 도착한 뒤 하와이 각 섬에 있는 사탕수수 농장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더 나은 삶을 꿈꾸며 미국에서 노동자 생활을 시작했으나 이들의 삶은 노예 그 자체였다. 이름도 없이 죄수와 같이 숫자로 불리는가 하면, 오전 4시30분에 일어나 해가 질 때까지 하와이의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 중노동을 해야 했다.

식사 시간도 보장받지 못했고, 일하던 중 허리라도 한번 펴기 위해 일어서면 어김없이 십장(foreman)이 휘두르는 채찍질의 대상이 됐다.

노동 계약기간 3년이 지나다 이 중 5000여명은 다시 조선으로, 나머지는 하와이보다 일당이 높고 노동환경이 좋다고 소문난 미국 본토 샌프란시스코로 향한다.

샌프란시스코에 당도한 이들은 하와이의 고된 노동으로 번 돈 대부분을 고국에 보내 무일푼인데다 영어도 못해 변변한 직업을 찾지 못하자 인력시장을 통해 아이오와의 탄광이나 애리조나 은광, 캘리포니아 중가주의 과일농장 등으로 흘러 들어갔다.
【서울=뉴시스】 김태겸 기자 = 기자가 지난 2월 12일, '3.1운동 및 상해 임시정부 100주년' 취재차 방문한 미 서부 중가주 리들리시이다. 사진은 미 중가주 리들리 공동묘지로 1903년 구한말 갤릭호에 올라 하와이를 거쳐 미국 본토로 온 한인 이주 노동자들이 잠들어 있는 리들리 공동묘지이다. 이들은 노예처럼 일해서 번 일당 5센트 가운데 상당액을 독립운동자금으로 기꺼이 내놓아 상해임시정부 재정에 크게 기여했지만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이역만리에서 제대로된 묘비명도 없이 쓸쓸하게 최후를 맞이했다.  1903~1905년 사이 고종은 수민원(綏民院. immigration office)이라는 이민귀화국을 신설하고 한인 노동자 약 7200여명을 미국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집단 이주 시켰다. 이 중 약 2000여명은 노동기간을 마치고 미국 본토인 샌프란시스코로 향한다. 그 중 일부는 탄광이나 은광으로 일부는 미 서부 중가주 리들리 다뉴바 과일 농장으로 향한다. 이들이 바로  상해 임시정부의 수립 자금의 60%를 낸 500여명의 민초 독립운동가들이다. 2019.04.10.  patk21@newsis.com
이 중 중가주로 향한 500여명의 한인 노동자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농업소도시인 리들리와 다뉴바에 정착한 이들은 배나 사과를 따서 박스에 넣어 포장을 하는 단순노동을 했다. 더 나은 생활을 기대했지만 10시간 이상의 노동과 매질은 기본, 잠자리조차 보장되지 않는 노예같은 삶은 이어졌다.

돈을 벌어 고국으로 가겠다는 일념으로 인종차별과 노예노동을 견디던 것도 잠시,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그 꿈마저 좌절되고 만다.

나라를 빼앗긴지 얼마 뒤 이들은 일본 대사관으로부터 한통의 편지를 받는다. '집조(여권)를 가지고 일본 대사관으로 찾아오면 일본 여권으로 교환해주겠다'는 내용이었다. 국적을 바꾸라는 통보였다.

그러나 다뉴바·리들리의 500여명 한인들은 일본대사관의 끈질긴 국적포기(여권 교체)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았다. 일본여권을 받는다는 것이 곧 변절자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집도 땅도 살 자격이 없는 무국적자로 남았다.

삶의 목적을 잃은 당시 한인 노동자들은 미국을 찾아 "잃어버린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독립운동 자금이 필요하다"고 호소하는 독립 운동가들에게서 새로운 희망을 봤다.

【서울=뉴시스】 김태겸 기자 = 지난 2월 상해 임시정부 100주년 취재차 갔던 미 서부 중가주 다뉴바시에서 만난 한인역사연구회 차만자 박사(캘리포니아 주립대 정치학과 명예교수)가 한인 이주노동자들의 기록물이 전시돼 있는 투라레카운티 박물관(Tulare County Museum)을 안내하고 있다. 1903년 구한말 갤릭호에 올라 하와이를 거쳐 미국 본토로 온 한인 이주 노동자들은 노예처럼 일해서 번 일당 5센트 가운데 상당액을 독립운동자금으로 기꺼이 내놓아 상해임시정부 재정에 크게 기여했지만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이역만리에서 제대로된 묘비명도 없이 쓸쓸하게 최후를 맞이했다.1903~1905년 사이 고종은 수민원(綏民院. immigration office)이라는 이민귀화국을 신설하고 한인 노동자 약 7200여명을 미국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집단 이주 시켰다. 이 중 약 2000여명은 노동기간을 마치고 미국 본토인 샌프란시스코로 향한다. 그 중 일부는 탄광이나 은광으로 일부는 미 서부 중가주 리들리 다뉴바 과일 농장으로 향한다. 이들이 바로  상해 임시정부의 수립 자금의 60%를 낸 500여명의 민초 독립운동가들이다. 2019.04.10. patk21@newsis.com
미주국민회 자료집에 따르면 당시 리들리·다뉴바 한인들은 1918년부터 1919년까지 상해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독립운동자금 특별모금을 진행해 13만8350달러를 상해로 보냈다.

중가주 한인역사연구회와 샌프란시스코 총영사관은 특별모금 당시 발급된 영수증을 근거로 다뉴바시의 도움을 받아 기념비를 세우기도 했다.

임시정부 수립 이후에는 조국을 되찾겠다는 일념 하나로 없는 살림에 돈을 모아 운영자금의 약 60%를 조달하며 임시정부의 든든한 후원자가 됐다.

중가주 한인들의 지속적인 독립운동 자금 지원 덕에 도산 안창호 선생과 이승만 전 대통령이 다뉴바와 리들리를 자주 찾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안창호 선생은 미주 한인들을 독립운동의 기반이라 생각하고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결성한 이후 중앙총회와 지방총회를 구성해 해외 한인들을 하나로 묶어 흥사단을 조직하게 된다.

이 전 대통령도 직접 독립운동자금을 받는 한편 중국의 손문에게 아이디어를 얻어 국채를 발행하는 등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펼쳤다.


patk21@newsis.com, jongwoo425@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