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발표한 데뷔 앨범 '시인의 마을'에 실린 '시인의 마을'과 '촛불'이 크게 히트하면서 단숨에 인기 가수가 됐다. 무엇보다 토속적인 노랫말로 서정성 짙은 한국형 포크를 들려준다는 호평을 들었다. 1979년 MBC 신인가수상과 TBC 방송가요대상 작사 부문 등 상도 휩쓸었다.
정태춘은 7일 충무아트센터에서 "한 단계 한 단계씩 준비된 것이 아닌 마구잡이로 주어진 노래 인생이었어요. 하지만 주어진 상황에서 열정을 다했죠. 노래는 거의 제게 전부였습니다"라고 말했다.
정태춘은 지난해 데뷔 40주년을 맞았다. 대표적인 '음유시인'으로, 1970년대 말 서정성 짙은 시적 표현의 노래들로 공감대를 형성하며 활동을 시작했다. 정태춘은 "노래로 저와 저의 존재와 실존적인 고민과 세상의 메시지를 다 담아낼 수 있었으니까 노래는 거의 제 인생의 전부였죠"라고 설명했다.
정태춘의 지음(知音), 즉 가장 절친한 음악동료는 부인 박은옥(62)이다. '부창부수(夫唱婦隨)'라는 말이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는 부부다. 20세기 후반 한국 사회의 모순과 저항을 온몸으로 담아낸 실천적 예술가로 통하는 정태춘의 곡들을 박은옥은 40년 간 묵묵히 소화해왔다.
이들 부부는 1980년대 사회변혁운동과 동행한 노래운동가들이다. 전통사회의 해체와 산업화에 대한 저항의 하나로 전통음악과 현대음악을 접목하는 '국악적인 노래 운동'을 시도했다.
소극장 순회공연 '얘기 노래 마당'을 통해 대중과 소통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을 지지하는 사회운동 성격의 순회공연 '송아지 송아지 누렁 송아지' 등을 벌이면서 '참여하는 노래 운동가'로 활동했다.
특히 정태춘은 음반 사전심의제도 철폐에 크게 기여한 가수다. 1990년 사전심의를 받지 않은 첫 앨범 격인 비합법 음반 '아, 대한민국', 1993년 역시 사전심의를 받지 않은 '92 장마, 종로에서'는 심의제도에 저항한 상징이다.
결국 정태춘은 '92 장마, 종로에서' 카세트테이프 3000개를 심의 없이 만들어 판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다. 하지만 정태춘은 굴하기는커녕 위헌법률 심판제청으로 맞섰다. 이후 대중문화인들이 정태춘에게 힘을 보태고 일반 지지도 이어지면서 1996년에 사전심의 제도가 폐지됐다.
이후 정태춘은 경기 평택 미군기지 확장 이전에 대항하는 '대추리 평화예술' 운동도 펼쳤다. 50대 중반 이후에는 시집을 출간하고, 사진전을 여는 등 다방면으로 예술 활동 보폭을 넓혔다.
다음 생에서도 다시 음악을 하고 싶다는 박은옥은 다만 한 가지 소망을 곁들였다. "정태춘씨처럼 재능이 있었으면 좋겠어요"라는 것이다. "저는 목소리로만 표현했지, 글을 쓰고 곡을 만드는 것은 못했어요. 그러니 옆에서 부러웠어요. 재능은 타고난 것이지, 노력으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절망도 느끼면서요, 하지만 음악이 없는 삶은 생각을 못했어요. 다음 생에도 노래하는 사람이 됐으면 하는 생각을 합니다."
이들 부부의 데뷔 40주년을 위해 여러 문화계 인사들이 뭉쳤다. '정태춘 박은옥 40 프로젝트'를 펼치고 있다. 11월까지 앨범 발매와 콘서트, 출판, 전시, 학술, 아카이브, 트리뷰트 프로그램 등을 잇따라 선보인다.
40주년 기념 앨범 '사람들 2019'는 부부가 2012년 낸 11집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 이후 7년 만에 내놓는 작품이다. 이번에는 딸 정새난슬도 참여한다. 목소리에 집중하고자 기타 중심의 절제된 반주가 입혀진다. 정새난슬의 제안대로 '빈 산' '고향' '나그네' 등 기존 곡들을 다시 불렀다. '들 가운데서'와 '이런 밤'에는 정새난슬이 함께했다.
'92년 장마, 종로에서'에 실린 '사람들'은 노랫말을 시대 흐름에 맞게 개사, '사람들 2019'라는 제명으로 다시 담았다. 앨범 수록곡 중 유일하게 시사적인 내용이 들어가 있다. 당시 교통사고, 산업 재해 등 죽음에 관해 노래한 곡으로 이번에는 2017년 우리 사회에 어떤 죽음이 있었는지를 톺아봤다.
이번 앨범에는 신곡도 포함했지만 정태춘은 오랜 기간 본격적인 곡 작업을 하지 않고 있다.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낸 이후 두 개의 앨범을 냈는데 시장에서 철저히 반응이 없는 상황을 맞이했어요"라고 고백했다. 무엇보다 자신의 고민을 담았다고 생각했는데 고민을 읽어주는 피드백이 없었다.
"대중예술가라면 대중의 기호, 취향을 따라가야 하는데 그것이 부족했어요. 제 생각에 세계와 한국 사회가 나아지고 있다는 낙관적인 전망에 전혀 동의를 안 해요. 내부 시스템 문제에 집중했죠. 우리 문명이 만들어낸 산업 시스템, 산업주의 문제에 대해 검열을 하고 한쪽으로 가면서 대중들과 멀어지게 됐고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 됐죠. 노래가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고 노래가 제 이야기를 담는 그릇이었는데 이제 적절치 않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정·박 부부는 전국투어 콘서트도 돈다. 4월13일 제주 아트센터를 시작으로 11월까지 서울, 부산, 전주, 창원 등 전국 13개 도시에서 '날자, 오리배'란 타이틀로 열린다. 부부 레퍼토리 전반을 조명하는 무대다. 서울 공연은 4월30일~5월7일 세종문화회관 M시어터로 예정했다.
40여명의 미술가가 참여하는 전시 '다시, 건너간다'는 4월 12~30일 서울 세종미술관 제1전시실에서 펼쳐진다. 예술가들의 오마주 작품과 공연, 토크쇼 등이 함께하는 융복합 전시다. 근래 붓글씨에 빠진 정태춘의 작품 30여점도 처음 공개된다. 이와 함께 정태춘이 과거에 낸 시집 '노독일처'가 복간된다. 신간 시집 '슬픈 런치'도 나온다. 문학평론가 오민석의 '가사 해설집'과 대중음악평론가 강헌의 '평론집'도 간행될 예정이다. 6월 한국대중음악학회 포럼, 7월 한국음악산업학회 포럼도 계획돼 있다.
총 36명의 대중음악 연구자와 문화 예술인의 기고와 자료를 바탕으로 한 단행본 출판도 예정돼 있다. 대중음악SOUND 발행인 겸 이번 사업단 수석프로그래머인 박준흠씨가 단행본 책임편집을 맡았다. 후배 뮤지션들이 정태춘·박은옥 부부의 노래를 재해석한 리메이크 앨범, 앨범 참여자들이 함께하는 축하 공연 등도 마련된다.
이번 프로젝트에는 이들 부부를 아끼는 다양한 장르의 문화계 인사들이 힘을 실었다. 영화 제작사 명필름 이은 대표는 "144명의 추진위원이 함께 하고 있어요. 1년 내내 함께 호흡하며 대중문화의 갈 길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자리가 됐으면 합니다"라고 했다. 박준흠 수석프로그래머는 "대중음악이 인문학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단초", 배우 권해효는 "세대를 연결해주는 전환점"이라고 기대했다.
정태춘의 지인들은 그가 세 번의 깃발을 들었다는 표현을 쓴다. 전교조 지지 공연 '송아지 송아지 누렁 송아지'가 첫 번째, 음반 사전심의제도 철폐가 두 번째, '대추리 평화예술' 운동이 세 번째다. 이제 네 번째 깃발을 들 때가 되지 않았나라는 말이 나온다.
"'아, 대한민국'은 어떻게 가수 활동을 해야겠다고 계획해서 만든 앨범이 아니라 그저 제 분노에서 나온 앨범이에요. 제게 그런 분노가 없으면 그런 노래를 만들 수 있었을까 생각이 들어요. 당시에는 노래의 미학, 노래에 대한 고정 관념, 고민 없이 제 안에서 나오는 솔직한 분노 들을 담아낸, 자연스런 흐름으로서의 앨범이었죠."
현 시점 정태춘의 분노 대상은 시장이다. "시장이 모든 것을 장악했어요. 이윤이 발생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죠. 시장과 예술이라는 화두가 내부에서 이야기가 됩니다. 기회가 되면 이번 프로젝트에서 모습을 드러낼 수 있지 않을까 해요."
정태춘은 이날 기타를 직접 잡고 자신의 노래 '리철진 동무에게'도 불렀다. 북한의 식량난 해결을 위해 임무를 띠고 남파된 대남 공작부 요원 리철진의 이야기를 초반에는 코믹하게, 마지막에는 묵직하게 그린 영화 '간첩 리철진'(1999·감독 장진)을 보고 나서 지은 노래다. 영화를 본 뒤 현실의 삶에 부대끼며 다양한 단상을 떠올리는 정태춘의 젊은 시절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서사력의 힘이 노래를 힘껏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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