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창제하신 목적은 국외적 문제와 국내적 문제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기 위함이었다. 세계 문자학사상 불멸의 금자탑인 훈민정음 해례본, 그 앞쪽 ‘어제훈민정음’ 첫 장에서 세종대왕은 “國之語音◦異乎中國◦與文字不相流通”으로 말씀을 시작하신다. 음과 토를 붙이면 “국지어음(國之語音)이 이호중국(異乎中國)하야, 여문자(與文字)로 불상유통(不相流通)할쌔”가 된다. 직역하면 “우리나라의 어음(語音: 말소리)이 중국에서와는 달라, 문자=한자와 서로 유통하지 아니하므로”이다. ‘한자’를 기준으로 삼아 말씀하시되 한자의 뜻이 아니라 음=소리 부분에서 문제가 있다고 포문을 여신 것이다. 뜻은 통하니까.
‘국지어음’의 ‘어음(語音)’에 대해 우리나라 사전에서는 ‘말의 소리’라 하고, 일본 사전에서는 ‘언어의 음성’, 중국 사전에서는 ‘언어의 소리(聲音)’라고 정의한다. <사진>에 보이는 훈민정음 언해본 서강대본(월인석보본)의 “나랏말싸미”에서는 “國之語音” 중 ‘音(소리 음)’에 대한 번역이 빠져 있다. 그래서 오해를 막고 보다 정확한 번역을 위해 ‘고려대육당문고 언해본(박승빈본)’에서처럼, 세종 이후 조선왕조 때 “나랏말싸미”는 “나랏말소리”로 이미 교정되었다. 단지, 지금의 국어 교육에서 이런 사항들을 학생들에게 가르치지 않고 있을 뿐이다.
참고로, 세종께서 ‘국어’라는 말을 써서 “國語之音(국어지음)”하지 않고 “國之語音(국지어음)”이라 한 것은, 당시 ‘국어’라는 단어가 춘추시대 열국의 역사를 기록한 유명한 책 이름으로 인식되어 그것과 혼동을 막기 위함이다. 세종 당시엔 ‘향어(鄕語)’ 또는 ‘리어(俚語)’ 등이 오늘날 우리가 쓰는 ‘국어’를 나타내는 말로 주로 쓰였다.
조선왕조 초기, 우리나라의 어음이 중국과 달라 문제가 되었던 상황들을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살펴보자. 첫 번째는 태종 4년(1404) 음력 8월 20일 사헌부의 상소문이다. “우리 조정은 바닷가 벽지에 치우쳐 있어 중국과 어음이 아주 다르므로, 통역관을 대동하여 소통합니다. 그래서 사역(司譯)의 직임은 진실로 중요합니다. 근래 들어 사역의 학습에 오직 한어(漢語: 중국어)만을 익혀서 경사(經史)의 학문을 알지 못한 탓에, 중국 사신이 말을 하다가 경사에 들어 있는 문구를 꺼낼 경우, 알아듣지를 못해 응대하는 데 실수하니, 매우 국가의 수치가 됩니다.”
이보다 심한 경우도 있었다. 비록 통역 일을 한다지만 한자를 해독하지 못하고 단지 중국의 어음(말소리)만 통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사람은 ‘只(다만 지)’자를 써서 ‘지통(只通)’이라 불렀다. 이와 반대의 상황도 있었다. 대한제국으로 바뀌기 전까지 조선왕조의 공식 국문은 한문이었다. 문장으로 치면 중국의 문인들과 비교하여 전혀 손색이 없는 뛰어난 문장가들로 조선은 넘쳐났다. 그런 문장가들은 중국 사람들과 글(한문)로써는, 즉 필담으로써는 당연히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하지만 한자를 발음하는 소리가 중국과 달라 말소리로써는 소통이 불가능하거나 매우 어려웠다.
두 번째는, 훈민정음 해례본이 완성되기 직전 상황이다. 세종 28년(1446) 음력 8월 15일, 중국에 세자의 관복을 청하는 건으로 영의정 황희 등이 임금에게 아뢴다. “우리나라는 중국과 어음이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중국말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임금의 뜻을 잘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김하는 중국말의 뜻을 훤히 아니, 외국에 사신으로 가서 능히 응대할 책임을 맡길 만합니다(我國與中國, 語音不相通, 非知漢語者, 不能道達上意也)”
이상 위에서 언급한 사항은 세종대왕이 훈민정음 창제를 통해 해결해야 했던 국외적인 문제를 언급한 것이다. 국내적인 문제, 즉 한문을 모르는 일반 백성들이 우리나라 조정이나 관청에 하소연할 때 겪는 문제, 한자를 어느 정도 알아도 중국어와는 어순이 다른 우리나라 말을 한자로써 적을 때의 문제 등을 해결키 위한 사항은 다음 편에서 계속 논한다.
대종언어연구소 소장 heobulan@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