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그는 검찰이 제출한 모든 증거에 동의하고 입증 취지만 부인한다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소식이 알려진 후 이 전 대통령 속내를 두고 여러 해석이 나왔다. 향후 재판에서 자신의 혐의와 관련해 불리한 진술을 할 것으로 예상되는 증인들의 법정 출석을 막으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관측도 있었다.
예상은 맞았다. 지난 23일 서울법원종합청사에서 열린 이 전 대통령 첫 공판에서 그는 증거동의를 결정한 배경의 중심에 '증인신문'이 있음을 스스로 알렸다.
"그들을 법정에 불러 추궁하는 건 가족이나 본인에게 불이익 주는 일이 될 수 있다. 국정을 함께 이끈 사람들이 다투는 모습을 국민에게 보여주는 건 받아들이기 힘든 참담한 일이다."
그는 이런 내용이 담긴 모두진술을 12분 간 진행했고, 남은 재판에선 법리 검토와 자료 공방만 이어질듯 보였다.
그런데 이 전 대통령은 법정에서 자신의 '집사'였던 김백준(78) 전 청와대 총무기획관의 정신과 치료내역 확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 돌연 "한마디 좀"이라며 끼어들었다. 40년 지기인 김 전 기획관에 대해 "보호해주고 싶다"고 했다.
그러더니 곧 삼성 소송비 대납 혐의와 관련해 이학수 전 부회장이 청와대에 들어왔다고 한 김 전 기획관의 검찰 조사 당시 진술을 반박했다.
그는 "이건희 삼성 회장이 들어왔다면 모르겠지만, 이 전 부회장이 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검찰이 "피고인이 그렇게 말하면 저희도 의견을 말씀드리겠다"라며 설명하려 하자, 이 전 대통령은 "그만하겠다. 내가 지금 검찰하고 싸우겠단 것도 아니고"라며 입을 닫았다.
자기 할 말만 한 뒤 치고 빠지는 전략을 쓴 셈이다. 이 덕에 이 전 대통령은 나름 얻은 것이 있다.
검찰의 진실 규명 수사에 적극 협조했던 김 전 기획관을 '정신이 온전치 않은 증인'으로 만들어버렸다. 동시에 '보호해주고 싶다'는 말을 함으로써 대인배 인상도 갖게 됐다. 결과적으로 자기에게 불리한 증인들은 증인석에 앉지 못하게 하면서 자신은 하고 싶은 말을 맘껏 한 것이다.
이 시점에서 이 전 대통령의 모두진술을 복기해보자.
"그들을 법정에 불러 추궁하는 건 가족이나 본인에게 불이익을 주는 일이 될 수 있다."
사실 객관적 근거가 없는 추측일 뿐이다. 더구나 16개 혐의로 중형 선고 가능성이 있는 이 전 대통령이 남 걱정할 상황도 아니다.
"국정을 함께 이끈 사람들이 다투는 모습을 국민에게 보여주는 건 저 자신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참담한 일이다."
이 대목도 마찬가지다. 본인이 힘든 게 문제가 아니라 국민에게 중요한 건 실체적 진실 규명이다. 대한민국은 서면심리주의가 아닌 공판중심주의이다. 이런 시스템에서 증인 신문의 중요성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이 전 대통령은 모두진술 초반에 이런 말도 했다.
"검찰 수사가 시작된 이후 진술을 거부하라고도 하고, 기소 후엔 재판도 거부하라는 주장이 많았다. 하지만 아무리 억울하더라도 일국의 대통령을 지낸 사람으로서 그런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옳은 말이다. 공감도 간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가졌다면 증인들을 모두 불러 법정대면을 하는게 옳다. 결백하다면 그들 앞에서도 당당하게 반박하고 다퉈야 한다. 그 과정 속에서 국민 신뢰 회복을 기대하는 게 도리다. '일국의 대통령을 지낸 사람으로서' 더 이상 군색해지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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