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대 손진책(71) 예술감독이 기반을 마련하고, 2대 김윤철(69) 예술감독이 해외 유통 플랫폼 창구를 만들었다면 지난해 11월 3대 예술감독으로 취임한 이성열(56) 감독은 "정체성을 확실히 잡겠다"는 목표다.
최근 서계동 국립극단에서 만난 이 감독은 "연극을 만들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이 감독은 "그간 부지를 마련하고 인력을 충당하고 해외 판로를 텄으니 이제 내수에 신경을 써야 한다"면서 "전임 감독님들의 네트워크를 잘 유지하면서, 연극인들과 만나고 소통을 하고 현장 연극인들을 참여시켜서 어떻게 연극계의 엔지 역할을 할 수 있을 지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특히 젊은 극작가들의 창작 희곡을 상시 접수하는 플랫폼인 '빨간 우체통', 연출가 개인이 천착해온 미학을 발전시킬 수 있는 '연출의 판'(예술감독 윤한솔 극단 그린피그 대표) 등은 창작극 및 작품 개발에 대한 이 감독의 의지를 반영한 프로그램이다.
기존 1년제로 운영한 시즌단원제는 2년제로 재편했다. 시즌단원 배우의 나이는 50세에서 45세로 낮췄고 올해 단원 18명을 새로 뽑았다.
이 감독은 "작품을 새로 개발하든 개척하든 그것을 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면서 "시즌단원을 비롯해 제도적인 장치는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봤다.
국립극단은 올해 역시 20개 작품을 선보인다. 레퍼토리 강화 차원에서 손 감독 시절 공연한 '3월의 눈'을 명동예술극장에서 선보이고 있다. 김 감독 시절 선보인 '가지'는 오는 21일부터,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9월 다시 올린다.
이와 함께 극작가 겸 연출가 오세혁이 쓰고 이 감독이 직접 연출하는 '전시의 공무원', 연출가 부새롬의 '2센치 낮은 계단' 등 창작 신작도 선보인다. '운명'과 '호신술' 등 근현대극, 프란츠 카프카 '성', 알베르 카뮈 '페스트' 등 세계 고전, 청소년극 '죽고 싶지 않아'와 '오렌지 북극곰' 등도 공연한다.
셰익스피어 '햄릿'의 단역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로젠크란츠와 길덴스턴은 죽었다'로 유명한 영국 극작가 톰 스토파드의 '록앤롤'을 연출가 겸 극작가 김재엽이 연출하는 무대도 눈길을 끈다. 우리시대 좌파 지식인들의 초상을 그릴 예정이다.
이 감독은 올해 레퍼토리의 큰 주제에 대해 "연극은 거울이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거울에 가까운 작품들 위주로 꾸렸다"고 소개했다.
"동시대적인 사회적인 문제, 인간의 보편적인 문제를 다룬 작품을 무대에 올렸으면 했다. 김수희 작가의 '말뫼의 눈물'은 조선업 노동자, 고연옥 작가의 '손님들'은 한국 현대사의 우화, 오세혁 작가의 신작 '전시의 공모'는 6·25 동란을 배경으로 한국인들의 애환, 윤미현 작가의 '텍사스 고모'는 다문화를 그린다."
이 감독은 "연극인들이 국립극단을 본인들의 활동 무대로 생각하게 된 것"이라면서 "덩달아서 국립극단에 대한 권리 의식이 높아졌다. 국립극단이 전체 연극계에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커진 것"이라고 봤다. 그 만큼 이날 현장 연극인들은 각기 다른 의견을 쏟아냈다.
이 감독은 "그 모든 것을 국립극단이 어떻게 혼자 다 처리하겠냐"면서도 "하지만 일종의 배 선장 같은 역할을 하니까, 가야할 큰 줄기는 있다고 생각한다. 100% 옳고 100% 그른 것이 없기 때문에 시기 마다 미션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이 감독은 '과부들' '봄날' 등의 수작 연출 경력뿐만 아니라 산울림 소극장 극장장, 극단 백수광부 대표, 한국연극연출가협회 부회장, 서울연극협회 부회장 등을 역임하며 극장 운영과 행정 감각을 익히며 한국 연극계 판의 생리를 잘 안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런 그가 3년 임기 동안 가장 주력할 거라 예고한 건 '한국 연극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것이다.
이 감독은 "한국 연극 정체성을 찾아서 이어 받고 개발해서 눈덩이처럼 굴려가서 키워나가고 싶다"면서 "국립극단에 와서 제가 먼저 한 이야기는 '온고지신(溫故知新·옛 것을 익히고 새 것을 안다)이다. 정체성에 대해서는 갑론을박할 수 있다. 하지만 만들고 그려야 그림이지, 그 전까지는 없는 것이다. 한국인의 정체성을 연극적으로 표현하고 싶다"고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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