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비각 안에는 위 폭 107㎝, 아래 폭 53㎝, 높이 93㎝ 크기의 비가 있다.
비는 위가 넓고 두꺼우며, 아래는 좁고 얇다. 윗 부분은 잘려 나가고 없지만 양 측면은 거의 원형으로 남아 있다.
이 비가 바로 국보 198호 '단양 신라 적성비(丹陽 新羅 赤城碑)'다.
단양 신라 적성비는 신라가 고구려 영토인 이곳 적성을 점령한 뒤에 민심 안정을 위해 세웠다.
학계에서는 비문과 '삼국사기' 내용을 분석해 진흥왕 6~11년(545~550년)에 건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
7일로 이 비가 최종 확인된 지 꼭 40년이다.
단양 신라 적성비를 발견한 고 정영호(1934~2017) 전 단국대 석좌교수는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전국협의회 충북지회가 2015년 9월 단양에서 연 '단양 신라 적성비 학술회의'에서 당시 발견 경위를 설명했다.
정 교수는 단국대 박물관장으로 1978년 1월6일 단국대 사학과 학생들을 인솔해 속칭 '성재', '온달성'으로 불린 단성면(당시 단양면) 하방리 산성을 조사했다.
이날 오후 4시께 정 관장은 학생대표를 데리고 정상부 쪽으로 올라 남쪽 죽령과 비로봉 등 지세를 둘러보다 직경 한 뼘 정도 되는 둥근 석재를 발견했다.
주위는 전날 밤 내린 눈으로 덮혀 있는데 이 돌에는 산에 오른 사람들이 신발에 묻은 진흙을 문질러 닦은 흔적이 있었다.
정 관장은 이 돌이 지휘본부 같은 건물의 주춧돌로 생각해 진흙을 떼어내고 손바닥으로 돌 표면을 닦으면서 이상한 촉감을 느꼈다.
침을 묻혀가며 닦은 돌에는 '大(대)' 자가 보였고, 잇따라 '阿(아)', '干(간)' 자가 계속 판독됐다.
정 관장은 이 돌이 '신라 고비(古碑)'임을 확신했고, 날이 저물어 소나무 가지와 잡초로 가려놓고 산을 내려왔다.
다음 날 일찍 양동이에 물을 담고 탁본 도구 등을 챙겨 올라가 정오께 비신을 비스듬히 세워 사진을 찍고 탁본을 했다.
비문에는 세 곳에 '赤城(적성)'이란 지명이 나온다.
고구려 적성현이었고, 신라가 이곳을 점령하고 축성한 적성산성임이 확인됐다.
정 관장은 "1월6일 오후 4시와 그 이후 시간은 참으로 잊을 수 없는 감격의 순간순간이었다"며 "글자가 자꾸 자꾸 노출될 때마다 일행의 환호성은 정말로 감격적이었다"고 회고했다.
단양 신라 적성비는 전체 글자 수가 440자 정도로 추정되고 판독할 수 있는 것은 288자다.
비문에는 신라의 영토 확장을 돕고 충성을 바친 적성인의 공훈을 표창하고 장차 신라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에게도 똑같은 포상을 내리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신라의 형벌과 행정 법규인 율령제도 발달 사실을 알려주는 이 비는 노역체제, 재산 분배에 관한 국법이 진흥왕 초기에 마련됐고 적성지방에 국한한 관습을 법으로 일반화했다는 사실 등이 파악됐다.
순수비(巡狩碑·왕이 순행하며 민정을 살핀 기념으로 세운 비)는 아니지만, 순수비의 정신을 담은 척경비(拓境碑·영토 편입을 기념해 세운 비)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도학 한국전통문화대 문화유적학과 교수는 논문 '단양 신라 적성비와 신라 진흥왕대 제비(諸碑)의 비교'에서 "단양 적성비는 신라가 소백산맥을 넘어 고구려 영내로 진출해 건립한 최초의 비석이었다"며 "창녕진흥왕척경비나 황초령비와 달리 외곽선이 없는 단양 적성비는 이들 비석보다 고형(古形)"이라고 밝혔다.
단양군은 이 적성비를 감싼 적성산성 일부 구간을 보수하고 있다.
2016년 집중호우에 붕괴된 성벽을 27.3m 보수했고, 올해도 해빙기 이후 40m가량을 해체 보수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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