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통번역가 김수빈 "번역은 빼기의 미학"

기사등록 2017/12/24 11:37:41
【서울=뉴시스】임태훈 기자 = 내한공연 뮤지컬 '시스터액트'를 번역한 번역가 김수빈 씨가 20일 오전 서울 마포구 한 카페에서 뉴시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17.12.24. taehoonlim@newsis.com
【서울=뉴시스】 이재훈 기자 = "뮤지컬 번역 자막에서 중요한 건 커뮤니케이션이 직관적으로 발생해야 한다는 거다. 미국식 유머가 강한 '시스터 액트'는 한국 관객에게 직관적으로 다가가기 위해 의역을 강화했다."

우피 골드버그 주연의 동명 영화(1992)가 바탕으로 내년 1월21일까지 블루스퀘어 인터파크홀 무대에 오르는 뮤지컬 '시스터 액트(SISTER ACT)' 첫 내한공연은 대중적인 뮤지컬의 전범이다.

무명 가수 '들로리스'가 조직의 보스 '브랜든'으로부터 살해를 당할 위협에 처하자 경찰이 그녀를 수녀로 위장해 보호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 흥겨운 분위기, 솔풀한 넘버, 몸을 들썩이게 하는 춤은 연말에 누구에게나 무리 없이 추천할 수 있다.

또 하나의 인기비결은 자막. '이거 실화냐?' '겨땀' '아주 칭찬해' 등 한국 유행어를 비롯한 적극적인 의역은 작품의 본질을 놓치지 않는 동시에 영어공연의 거리감을 한껏 줄여준다. 글씨체나 글씨 크기로 배우들의 감정과 유머를 표현한 '자막 연출'도 일품이다.

역시 풍자 등 웃음 코드가 다분했던 '애비뉴Q' 내한공연, 한국어 말맛을 잘 살려냈다고 평가를 받는 '스팸어랏' '스위니 토드' 같은 라이선스 공연을 작업한 뮤지컬 통번역가 겸 각색작가인 김수빈(30)의 솜씨다. 그녀는 지난해 '예그린 어워드'에서 '스위니토드'로 각색·번안상을 받기도 했다.

번역 작업을 '빼기의 미학'으로 정의하는 김 번역가를 최근 합정역 인근에서 만났다.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영상원 출신인 그는 영어를 전공하지 않았다. 다만 미국에서 태어나 7세 때까지 현지에 산 그녀는 이후 한국에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꾸준히 감각을 익혀왔다.

출산과 육아, 결혼생활 등의 무거운 주제를 소꿉놀이처럼 그려낸 영화 '소꿉놀이'를 감독한 팔방미인이기도 한다. 현재는 뮤지컬 창작이라는 또 다른 꿈에 도전 중이다.
 
【서울=뉴시스】임태훈 기자 = 내한공연 뮤지컬 '시스터액트'를 번역한 번역가 김수빈 씨가 20일 오전 서울 마포구 한 카페에서 뉴시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17.12.24. taehoonlim@newsis.com
Q. 이번 '시스터액트' 번역 작업에서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은 무엇인가?
 
A. "예능 감각에 대한 수위 조절이다. 유행어를 남발하게 되면 자막이 극에 버무려진다는 느낌보다 튄다는 느낌이 더 든다. 기억나는 것이 유행어밖에 없게 되는 거지. 덜어내는 작업이 중요했다."
 
Q. 자막에 이모티콘을 활용하는 점도 눈길을 끈다.

A. "뮤지컬 '애비뉴Q' 내한공연(2013) 작업 때 '번역 자막으로 어떻게 웃기지'라는 고민을 했다. 사람의 감정을 표현할 때 글이나 말도 있지만 기호학적인 측면으로 감성을 건드리는데는 이모티콘이 효과적이다. 관객이 자막을 볼 시간과 여유가 없을 때 특히 도움이 된다."

Q. 번역 자막을 만들 때 방법론이 있나?
【서울=뉴시스】임태훈 기자 = 내한공연 뮤지컬 '시스터액트'를 번역한 번역가 김수빈 씨가 20일 오전 서울 마포구 한 카페에서 뉴시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17.12.24. taehoonlim@newsis.com
 
A. "말 자체의 번역으로 웃길 것이냐, 상황으로 웃길 것이냐에 따라 방법론을 정한다. 예를 들어 '시스터액트'에서 원장 수녀가 수녀원에 온 들로리스의 화려한 의상을 보고 '우리 집 근처의 와와 푸드마켓보다 눈에 잘 띄겠다'고 말하는 부분이 있는데 생각보다 외국 사람들이 많이 웃더라. 한국 관객에게는 안 웃길 수 있어 '와아 정육점'으로 바꾸고, 네온사인까지 추가시켰다."

Q. 관객이 자막을 볼 때 생기는 눈의 피로도까지 생각한다고?
 
A. "내한공연에서 관객은 1000장에서 많으면 2000장에 가깝게 변하는 자막을 봐야 한다. 어둠 속에서 보는 것 자체가 피로한데, 눈을 계속 새우눈처럼 움직여야 하니, 힘들지. 어차피 봐야 하는 자막이라면 효과를 증대시키는 역발상의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한번 볼 때 알차게 볼 수 있어야 하는 거다. 인터미션을 제외하고 주어진 2시간10분 동안 관객이 최적화된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늘 고민하고 있다.'

Q. '시스터액트'는 어떤 작품이라고 생각하나?

A. "좋은 공연이다. 가르치려는 자세를 취하기보다 관객들이 보고 나면 몸의 에너지가 정화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가뿐해진다고 할까. 개인적으로 코미디를 가장 좋아한다. 웃기는 것이 어렵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평소에도 기술적으로 웃기는 부분에 대해 잘 관찰한다. 그리고 그걸 해체했다가 재조합하는 작업을 즐긴다. '시스터액트' 작업은 그런 공부를 할 수 있게 해줬다."

【서울=뉴시스】임태훈 기자 = 내한공연 뮤지컬 '시스터액트'를 번역한 번역가 김수빈 씨가 20일 오전 서울 마포구 한 카페에서 뉴시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17.12.24. taehoonlim@newsis.com
Q. 뮤지컬 번역은 어떻게 입문하게 됐나?

A. "한예종에서 방송영상 연출을 전공할 당시 연극원 수업을 들었는데 외국에서 온 장학생들이 한국말을 잘 못해서 통역을 해준 적이 있다. 그걸 본 교수님(가두현 오디컴퍼니 슈퍼바이저)이 제안을 해 뮤지컬 '마이 페어 레이디' 때 통역을 일을 맡았다. 영어는 미국 드라마, 개그 프로그램을 꾸준히 보면서 익혀왔다. 그러다 아이가 생겨 통역일을 할 수 없게 됐는데, 번역 작업이 맡겨졌다. '스팸어랏'이었다. 초연에는 힘만 보탰고, 재연에서 각색에 통역, 조연출까지 맡았었다. 이후 많은 분들이 좋게 봐주셔서 '애비뉴Q', '킹키부츠' '스위니 토드' 등의 작업이 이어졌다."

Q. 번역은 영어뿐만 아니라 한국어도 잘해야 한다. 신선한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점이 있나?

A. "외국 개그 프로그램은 물론 국내 만화, 국내 개그 프로그램을 많이 본다. 무엇보다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예를 들어 자주 가는 미용실의 원장님이 머리를 잘 만지시는데, 사람 응대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재빠르고, 센스 있게 공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응대하시는데 사람을 편하게 만들고 웃게 해준다. 그렇게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이 재미다. 유명한 연예인의 개인기는 경외하면 된다. 사람을 재미있게 하는 법의 패턴과 규칙 등을 계속 공부하고 연구 중이다. 안 쓰는 단어를 조합하거나, 특정한 상황에 다른 상황을 대입해서 은유하거나 등의 방법이다. 연출을 전공한 것도 큰 도움이 됐다. 번역 작업을 할 때 긴장 조율과 템포 조절에 큰 보탬이 된다."

Q. 장르는 다르지만, 지난해 영국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에서 '채식주의자'로 한강 작가와 함께 번역가인 데버러 스미스도 이 상을 함께 받으면서 번역의 중요성이 부각된 바 있다. 번역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A. "번역도 창작이라는 것에 동의한다. 누군가는 '번역이라는 것은 없다. 재창작만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어떤 작업이냐에 따라 다를 것 같긴 한데 소설이나 기사 번역은 공연 번역보다는 여유가 있다. 공연은 비교적 여유가 없다. 하지만 그 여유가 없는 것조차 내보이면 안 된다. 그래서 관객들이 마음으로 받아들 수 있게끔 만져야 한다. 대신 뿌리가 분명해야 한다. 의역을 하다보면 작품을 훼손했다는 이야기도 나오는데, 번역의 근거가 분명해야지 그런 이야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번역을 해체와 재조합으로 이야기한다. 같은 자료와 원소를 가지고도 삼각뿔, 구 등 다양한 입체도형을 만들 수 있다. 그래서 내게 번역가의 이미지는 같은 철로 다양한 모양을 만들 수 있는 대장장이와 같다."

 realpaper7@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