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UBC 은퇴' 황혜민·엄재용 '오네긴'...'발레해줘서 고마워요♥'

기사등록 2017/11/26 22:57:16 최종수정 2017/11/26 23:08:52
【서울=뉴시스】 황혜민·엄재용, '오네긴' 마지막 공연. 2017.11.26. (사진 = 유니버설발레단 Photo by Kyoungjin Kim 제공)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이재훈 기자 = '발레요정'였던 유니버설발레단(UBC) 간판 수석무용수 황혜민(39)이 결국 눈물을 터뜨렸다. 엘리자베스 앤의 노래 '더 레터(The Letter)'를 배경음악으로 자신과 남편인 엄재용(38)의 발레단 활동 영상이 상영되는 내내 고개를 바닥으로 떨구고 있었던 그녀다. 엄재용은 아내를 지긋이 바라보더니, 어깨를 살며시 토닥였다.

26일 밤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UBC의 '오네긴'(안무 존 크랑코) 공연이 끝나고 영상에 '잊지 않을게요. 발레해줘서 고마워요♥'라는 문구가 뜨자 하늘에서 금빛 가루가 흩뿌려졌다. 4층 객석을 가득 채운 관객들이 영상에 뜬 문구가 그대로 적힌 플래카드를 일제히 펼치자 황혜민은 눈물을 끝내 참지 못했다.

독일에서 초연한 지 올해로 50주년을 맞은 '오네긴'의 3막2장에서 황혜민의 타티아나와 엄재용의 '오네긴'이 선보인 '회한의 파드되'는 세상에서 가장 애절한 2인무였다.

두 사람의 UBC 은퇴 공연이자 황혜민의 현역 무용수 은퇴 공연인 이번 '오네긴'은 지난 24일과 25일에도 같은 장소에서 공연했다. 하지만 '진짜' 마지막 공연인 이날 두 사람의 감정은 극한으로 치달았다.

연기가 주가 되는 드라마 발레의 걸작 '오네긴'에서 관람 포인트는 귀족청년 오네긴과 시골처녀 타티아나의 파드되 그리고 두 사람의 설렘과 이별 그리고 후회의 감정이다.

【서울=뉴시스】 황혜민·엄재용, '오네긴' 마지막 공연. 2017.11.26. (사진 = 유니버설발레단 Photo by Kyoungjin Kim 제공) photo@newsis.com
1막에서 편지를 찢으며 타티아나의 순정을 무참히 짓밟았던 오네긴은 3막에서 다른 남성과 결혼한 타티아나에게 사랑이 담긴 편지를 건넨다.

황혜민과 엄재용이 음악만 들어도 눈물이 난다는 '오네긴'에서 가장 애틋한 작용과 반작용 또는 구심력과 원심력을 주고받게 되는 시작이다.

감정을 갖풀로 삼아 춤과 연기가 끈적끈적하게 붙어 있는 '오네긴'에서도 격한 정서가 가장 절정에 달한 부분으로 황혜민과 엄재용은 밀물과 썰물처럼 동작과 감정을 건네고 받았다.

각각 2002년과 2000년에 유니버설발레단으로 입단해 2012년 8월 '최초의 현역 수석무용수 부부'가 됐던 황혜민과 엄재용은 1000회가 넘는 무대에서 호흡을 맞췄다.

【서울=뉴시스】 황혜민·엄재용, '오네긴' 마지막 공연. 2017.11.26. (사진 = 유니버설발레단 Photo by Kyoungjin Kim 제공) photo@newsis.com
그간 두 사람이 수없이 주고받았던 들숨과 날숨은 이날 공연을 위한 것처럼 보였다. 춤은 기본이요, 무르익은 연기력과 농축된 감정을 보여줘야 하는 이 작품에서 두 사람의 연륜은 극의 밀도를 높이는데 좋은 땔감이 됐다.

오만했던 오네긴이 자신의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며 무릎을 꿇어도 타티아나는 그의 눈앞에서 편지를 찢어버린다. 오네긴은 절망하고 타티아나는 격정에 휩싸인다.

자그마하고 가녀린 체구로 '발레계 요정'으로 통한 황혜민의 우는 모습은 객석을 찢어놓았다. 부서진 사랑의 파편이 무대와 작별하는 황혜민 본인의 감정 조각 느껴졌기 때문이다.

엇갈린 사랑에 절규하는 두 남녀의 여운이 발레와 이별하는 회한이 돼 공연장을 짙게 맴돌았다. 이처럼 최근 발레 공연장 분위기가 먹먹했던 순간이 최근 있었던가.

【서울=뉴시스】 황혜민·엄재용, '오네긴' 마지막 공연. 2017.11.26. (사진 = 유니버설발레단 Photo by Kyoungjin Kim 제공) photo@newsis.com
현역 생활 동안 부상 한번 당하지 않은 철저한 '자기관리의 달인'인 황혜민답게 은퇴날까지 절정의 기량을 뽐냈다. 특히 첫 장면에서 엎드려 책을 읽는 모습은 영락없는 소녀였고 3막에서는 고혹적인 중년의 여성으로 변신했다. 마치 자신의 인생을 압축한 듯한 연기 흐름이었더.

발레단 15년 생활의 마침표가 아쉽지 않은 이유다. 우리 나이로 올해 마흔살이 된 그녀는 출산 등 여자로서의 삶을 위해 토슈즈를 벗기로 했다. 엄재용은 아내와 함께 UBC를 떠나지만 여전히 현역 무용수로서 아내의 남은 꿈을 지원한다.
  
커튼콜에서 홍향기를 시작으로 UBC 단원들이 황혜민과 엄재용에게 꽃다발을 건네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두 사람이 미처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꽃다발 숫자가 많아졌는데, UBC 관계자들이 두 사람에게 전하는 사랑의 무게였다. 공연계의 어른인 단국대 문화예술대학원 원장, 무용평론가 장광열 등도 꽃다발을 건넸다.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출신으로 황혜민과 절친한 발레리나 김주원 등 발레계 유명 스타들은 객석을 지켰다.

【서울=뉴시스】 황혜민·엄재용, '오네긴' 마지막 공연. 2017.11.26. (사진 = 유니버설발레단 Photo by Kyoungjin Kim 제공) photo@newsis.com
커튼콜이 끝난 뒤 두 사람의 가족과 지인, UBC 단원들과 관계자들은 예술의전당 한편에서 모여 황혜민·엄재용 부부의 앞길을 축복했다. 단원들이 두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이 담긴 5분가량의 영상을 상영했다. 이 자리에서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커튼이 완전히 닫힌 뒤에도 관객들은 객석에서 오래도록 박수를 보냈다. 일부 관객은 극장 출연자 출입구 앞에서 한동안을 서성거렸다.
  
문훈숙 UBC 단장은 이날 공연 전 '오네긴'을 해설하면서 "춤이 삶 자체의 표현이었던 두 사람을 눈물과 열정으로 기억해달라"고 울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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