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뉴시스】김지호 기자 = 홀로 운전하거나 승객을 태운 차들이 '빨리빨리' 문화 속에 더 빠른 속도를 내다가 도로에서 죽음을 부르고 있다.
최고속도보다 감속해야 하는 빗길에서 오히려 과속하거나, 안전을 위해 장착된 속도제한장치를 해체하는 등 도로 위의 안전불감증이 여전하다.
◇속도제한장치 해체···대형 사고 유발
시중에서 출고되는 대형화물차나 전세버스 등 사업용 차량에는 과속운전을 방지하기 위한 속도제한장치가 부착돼 있다.
속도제한장치는 대형버스·승합차는 시속 110㎞, 4.5t을 초과하는 화물차는 시속 90㎞로 최고속도를 제한해 일정 속도가 넘어가면 연료 분사가 되지 않도록 하는 장치다.
대형차량의 사고일수록 인명피해가 커지는 탓에 최소한의 안전을 위한 장치인 셈이다.
이같은 장치도 전문 기술자의 손에 넘어가면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된다. 차주들은 조금이라도 더 빨리 목적지로 도착하기 위해 기술자들에게 의뢰해 전자 장비 등을 이용한 방식으로 해체한 뒤 질주한다.
속도제한장치를 해제하면 최고 속도가 시속 150㎞에 달할 정도로 빨라지면서 그만큼 위험성은 배가 된다.
문제는 속도제한장치를 해제한 차량이 외관상 쉽게 식별되지 않는 탓에 사전에 적발이 어려운 점이다.
경기남부지방경찰청에 적발된 속도제한장치 해체 건수는 지난해 14건에 불과했으나, 올해 들어 대형차량의 사고가 잇따르면서 단속도 늘어나 이달 중순까지 35건이 적발됐다.
최근에 적발된 한 차량은 교통사고를 낸 뒤에야 적발되기도 했다.
지난달 14일 오후 4시25분께 경기 양평군 지평면의 한 고갯길에서 내리막길을 주행하던 25.5t 덤프트럭이 중앙선을 넘어 마주 오던 A(53·여)씨의 경차를 덮쳐 A씨가 숨졌다.
사건을 수사하던 경찰은 덤프트럭 B(57)씨가 빗길에 미끄러지면서 사고를 낸 것으로 원인을 파악했지만, B씨가 사고 직후 급하게 차량을 판매하려고 하는 점을 수상히 여겼다.
경찰은 B씨가 만난 중고차 딜러를 통해 차량을 보존토록 한 뒤 내부 점검을 하다가 속도제한장치를 해체한 사실을 확인했다.
경찰은 속도제한장치를 해체한 차량 대다수가 목적지까지의 운행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그같은 불법행위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차량에 짐을 가득 실은 상태로 과속운행을 하게 되면 브레이크나 조향 장치가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않아 대형사고가 우려된다.
이에 따라 경찰은 지난 7월10일부터 이달 1일까지 8주간 운수업체를 상대로 의무위반 단속을 벌이는 등 집중 단속을 했다.
속도제한장치를 해체하게 되면 도로교통법에 따라 6개월 이하 징역 또는 2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해진다.
경찰 관계자는 "대형차량이 고속으로 주행하게 되면 그만큼 사고 위험성은 더욱 높아진다"며 "일찍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 빨리 운전하기보다는 안전하게 운행하는 문화가 정착되도록 계속해서 단속에 나설 방침"이라고 말했다.
◇사업용 자동차 사고비율 높아···'빨리 빨리' 문화 탓
경기남부지역에서 올해 들어 지난 6월까지 발생한 사업용 차량의 교통사고는 3735건이다. 사망자는 58명, 부상자는 6181명에 달한다.
같은 기간 일반 차량의 사고는 1만1871건으로 사망자와 부상자는 각각 154명, 1만8137명이다.
단순 수치로는 일반 차량 사고가 많고 부상자도 많다. 하지만 차량 등록 대수를 고려한 사고 비율은 사업용 차량 사고가 압도적으로 높다.
지난 6월 말일 기준 경기남부지역에 등록된 사업용 차량은 16만3527대, 일반 차량은 375만8833대로, 일반 차량이 23배나 많다.
등록 차량 대비 사고 건수를 계산하면 사업용 차량의 사고 비율은 2.28%, 일반 차량은 0.31%로 사업용 차량이 7.3배 많다.
실제 지난해 경기지역에서 발생한 교통사고 5만1013건 가운데 일반 차량과 사업용 차량이 낸 대형사고는 14건에 불과하지만, 화물 차량이 낸 중대사고는 752건에 달한다.
대형사고는 사망자 3명 이상 또는 부상자 20명 이상인 사고이며, 화물 차량 중대사고는 1명 이상 사망자 또는 중상자가 발생한 사고다.
지난 7월 9일 서울 서초구 경부고속도로 서울 방향 양재나들목 인근에서 광역버스가 앞서 주행하던 승용차 뒷부분을 들이받아 모두 2명이 숨지고 16명이 다치는 사고가 났다. 다음날에도 경기 여주시 강천면 영동고속도로 강천터널 인근에서도 사망 사고가 났다.
강천터널을 빠져나온 고속버스가 과속으로 주행하다가 빗길에 미끄러지면서 중앙선을 넘어 마주 오던 SM5 승용차를 덮쳐 1명이 숨지고 1명이 크게 다쳤다. 경찰 조사 결과 빗길에 시속 90㎞ 수준으로 감속 운행을 해야하지만 시속 110㎞대로 주행한 것으로 드러났다.
전문가들은 사업용 차량의 사고 원인으로 빨리빨리 문화에 젖은 법규 위반과 운수업체의 구조적인 문제를 꼬집었다.
범칙금 수준을 올리는 방법도 법규 위반을 줄이는 데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분석도 내놨다.
삼성교통안전문화연구소 장택영 박사는 "충분치 못한 휴식 시간 등 열악한 근무 환경에서보다 빨리 운행하려다가 졸음운전을 하거나 법규 위반을 하면서 사고가 벌어지고 있다"며 "법규 위반 범칙금을 상향하거나, 행정당국에서 책임을 갖고 도로안전을 강화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조금이라도 빨리 도착해야 휴식시간이나 업무적 편의 등이 있기 때문에 졸음 상태에서 운전을 하는 실태도 심각한 수준"이라며 "화물차 운전자들도 자기 차를 운행할 때는 화물차 근처도 가지 않는다고 증언한다"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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