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란·소시지 먹거리 공포, 채식으로 다스린다

기사등록 2017/09/07 15:25:42
계란 파동 후 채식 홈피 방문자 1만명 급증
가수 이효리, 영화 '옥자' 등 채식 관심 높여
음식 나누는 채식 모임에 동아리까지 생겨
"살충계 계란 불안감 반영···생활정치 과정"

 【서울=뉴시스】김성진 기자 = "계란도 육류도 먹기가 겁나 '페스코 채식(육류를 먹지 않고 해산물은 먹는 채식)'을 시작했어요."

 세종시에 사는 임산부 김지우씨는 최근 식단을 채식으로 바꿨다. 원래 육식을 즐겼으나 살충제 계란, 간염 소시지 파동 이후 먹거리에 대한 불안감이 커졌기 때문이다. 김씨는 "갈수록 믿고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없어 막막하다"며 "특히 간염 돼지고기가 태아에게 치명적이라고 해서 유기농 채소 위주로 먹으려고 한다"고 밝혔다.

 중고생 자녀를 둔 주부 김성숙씨도 "아무리 조심해도 안전할 수 없으니까 절망스럽다. 원래부터 채식을 했는데 아이들에게도 채소 이외 음식은 아예 먹이고 싶지 않다. 요즘 많은 주부들이 이런 생각을 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먹거리 파동'이 있을 때마다 채식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아진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웰빙'이라는 신조어 등장과 맞물려 2003년 아시아를 강타한 조류독감과 미국산 쇠고기 광우병 파동으로 채식뷔페, 유기농 전문점 등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후 2008년 광우병·조류독감 사태을 거치며 채식에 대한 열풍은 더 커졌다.

 한국채식연합 이원복 대표는 "해마다 일어나는 음식대란 때문에 채식에 대한 관심이 늘었다고 본다"며 "100% 채식주의자로 전환하지 않더라도 많은 분들이 채식 위주의 식사를 선호하고 채식 요리를 배우려는 분들이 많이 늘었다"고 설명했다.

 ◇유명인, 영화 등 영향으로 채식 결심···온라인 커뮤니티도 활발

 한국채식연합에 따르면 이 단체 홈페이지 평균 방문자 수는 5000명 수준이었다. 그러나 살충제 계란 파동 직후 1만5000여명으로 급증했다. 회원 수는 지난 5일 기준 2만5225명이었다. 한 채식 관련 인터넷 카페도 매달 100여명의 회원이 가입해 같은날 기준 7만3600명에 육박했다.

 대부분 '건강상의 이유'로 채식을 결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당뇨, 심혈관 질환 등 성인병에 걸리기 쉬운 중장년층은 몸에 이상 신호가 오면 식습관 개선부터 하는 경우가 많다. 당뇨와 고혈압을 앓고 있는 박회숙(55·여)씨는 "육류 섭취를 줄이고 있었는데 이번 살충제 계란 파동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채식을 시작하게 됐다"며 "건강 때문에 채식을 찾는 지인도 많다"고 말했다.

 미디어에서 채식이나 동물권을 많이 다루면서 젊은 사람들도 채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유명인의 채식이나 동물권을 다룬 영화, 다큐멘터리 등을 보고 채식을 결심한 경우다.

 동물보호를 위해 채식을 선언한 가수 이효리씨는 최근 예능 프로그램에서 '페스코 채식'을 한다고 알려져 눈길을 끌었다. 배우 송일국씨, 이하늬씨 등도 언론을 통해 채식을 한다고 알려지면서 대중의 관심을 높였다.

 채식주의자는 보통 5~7단계로 나뉜다. 이효리씨가 하고 있는 '페스코 채식'은 육류는 먹지 않고 해산물과 유제품을 먹는 것이다. 육류는 먹지 않고 조류·해산물을 먹는 '세미채식', 육류·해산물을 먹지 않고 유제품은 먹는 '락토오보채식', 동물성 식품을 전혀 먹지 않는 '비건채식', 과일·곡물·잎사귀만 먹는 '프루트채식', 요리를 하지 않고 먹는 '로푸드(생채식)' 등이 있다.

옥자, 영화
직장인 김세민(28·여)씨는 "이효리처럼 사는 게 소신 있고 멋져 보인다"며 "계란 파동도 있어서 이참에 다이어트도 할 겸 채식을 해보려고 한다"고 밝혔다.

 대학생 김지석(23)씨는 최근 개봉한 영화 '옥자'를 보고 채식을 결심했다. '옥자'는 슈퍼 돼지를 이용해 돈을 벌려는 글로벌 기업의 탐욕과 슈퍼돼지 '옥자'를 구출하려는 주인공의 험난한 여정을 그린 영화다.

 김씨는 "영화 '옥자'를 보고 공장식 축산업이 동물에게 극악의 고통을 가하고 대부분 고기가 잔인한 방법으로 생산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며 "동물에게 고통을 덜 주는 방법으로 채식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20~30대에서 환경·동물보호에 관심이 많아 채식주의자가 집중적으로 늘었다"며 "중장년층인 40~50대 이상은 건강 때문에 채식을 시작하시는 분이 많다"고 설명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도 '헬스 다큐멘터리를 보고 채식을 시작하게 됐다', '가축 사육과 도축의 비윤리성에 관심을 가지게 돼 채식을 시작하려고 한다' 등 다양한 이유로 채식을 결심한 사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오프라인 일반인 채식 모임···대학 채식동아리 활동 활발

 채식에 대한 관심은 온라인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모임을 만들어 함께 식사도 하고 채식에 대한 정보를 주고받기도 한다.

 '로푸디스트(생채식하는 사람)'라고 밝힌 30대 직장인 김여운씨는 9일 서울 광화문에서 오프라인 모임을 준비하고 있다. 참여자는 인터넷 카페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모집했다.

 김씨는 "채식하는 사람은 모임에 나가도 먹는 음식 때문에 소외감을 느끼거나 준비된 음식을 먹지 못하는 불편이 있다"며 "그런 걱정 없이 마음 편히 와서 본인의 신념이라든지 식생활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고 음식도 가리지 않고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자리를 만들고 싶었다"고 밝혔다.

 대학가에도 채식동아리가 꾸준히 늘고 있다. 서울대 '콩밭', 고려대 '뿌리:침', 연세대 '베지밀', 이화여대 '솔찬', 서울시립대 '베지쑥쑥' 등이 대표적이다.

 서울시립대 채식동아리 '베지쑥쑥'은 지난 5월에 만들어진 신생 동아리다. 동아리를 만든 유다님(22·여)씨는 "채식에 대한 편견이 심하기 때문에 학교 주변이나 다른 지역의 채식 식당을 소개하고 채식을 알리기 위해 모였다"며 "외국인 교환학생 중 채식주의자가 있는데 식당 정보가 없기 때문에 그들을 위한 정보 책자를 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고려대학교 채식동아리 '뿌리:침'은 매주 '베지위크'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채식을 희망하는 사람을 자발적으로 받는다. 희망자들은 4인1조로 묶여 채식 인증사진을 공유하기도 하고 채식 정보를 주고받는다. 4개월간 100명이 참여했다.

 '뿌리:침' 회장을 맡고 있는 이혜수(19·여)씨는 "채식주의자라고 하면 장벽이 높게 느껴진다"며 "베지위크 프로그램은 꼭 채식주의자가 아니어도 채식을 지향하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씨는 "대학마다 채식을 하는 인원이 적다"며 "앞으로 채식지향인 범네트워크를 만들어 공동으로 학교 식당에 채식을 요구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서울=뉴시스】김성진 기자 = 지난 3일 찾은 경기도 과천시 한 채식뷔페는 예약을 하지 않으면 이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손님이 많았다. 메뉴는 콩으로 만든 치킨인 소이 후라이드(왼쪽), 채소롤(오른쪽) 등 채식주의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먹기에 부담없는 음식이었다. 2017.09.06 ksj87@newsis.com

 ◇채식식당 등 업계 매출 증가···"먹거리 불안과 생활정치 과정"

 채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채식 전문식당이나 채식 제과점, 채식 관련 서적 등 관련 업계 매출도 늘고 있다.

 지난 3일 찾은 경기 과천의 한 채식뷔페는 예약을 하지 않으면 이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손님이 많았다. 주말 저녁 가족이나 친구, 연인과 함께 온 손님들로 식당은 북새통을 이뤘다. 메뉴도 소이 후라이드(콩으로 만든 치킨), 콩고기로 만든 불고기, 채소롤 등 채식주의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먹기에 부담없는 음식이었다.

 가족과 채식뷔페를 찾은 김태인(45)씨는 "나들이 갔다가 오는 길에 들렀다"며 "계란이나 돼지고기 파동도 있고 아이들 건강도 생각해 채식식당을 이용하게 됐다"고 말했다.

 뷔페 매니저 김현진(39)씨는 "채식 전문 식당이다 보니 전에는 단골만 주기적으로 왔는데 최근에는 소개로 오거나 인터넷을 보고 오는 손님이 늘었다"며 "살충제 계란 파동 이후에 평일에도 주말처럼 자리가 꽉 찬다. 손님은 20% 정도, 매출은 30% 정도 늘었다"고 밝혔다.

 온라인 유기농 채식 제과점을 운영하는 이호상(44)씨는 "살충제 계란 파동 이후 매출이 50% 정도 늘어난 것 같다"며"선주문 후생산 방식인데 주문통화가 평소 10통이었다면 요즘은 5배 정도 늘었다"고 설명했다.

 채식 관련 서적 판매량도 늘었다. 인터넷 서점 YES24에 따르면 살충제 계란 파동이 발생한 8월14일부터 31일까지 채식 서적 판매량은 전달 같은 기간 대비 24% 증가했다.

 전문가들은 채식에 대한 관심 증가를 먹거리 불안감과 생활정치의 과정으로 분석했다. 식사와 같은 일상생활에도 동물권이나 환경 등에 대한 자신의 소신이나 신념을 반영하는 행위가 이뤄진다는 의미다.

 김윤태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최근 살충제, 유전자 조작으로 식품안전에 대한 불안이 커져 채식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 동물권을 찾는 차원에서 대안적인 음식 문화를 찾는 사람도 있다"며 "각자 이유는 다르지만 분명한 것은 살충제 계란에 대한 불안감과 공포감 등이 반영돼 채식을 찾는 사람이 더욱 늘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김 교수는 "우리나라는 동물운동이나 녹색생활에 대한 광범위한 생활정치, 대중운동이 정착 중"이라며 "채식에 대한 관심 증가는 생활정치, 대중운동 과정이 반영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풀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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