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21일 문화역서울 284 RTO 무대에 오른 연극 '오이디푸스 - 알려고 하는 자'는 이 선언으로 시작됐다.
공연 초반 약 20분 동안 100명이 공연장을 돌아다니면서 또는 서서 지켜봐야 하는 이 작품은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없다. 말 그대로 공연장이 광장이 됐다.
세월호 참사로 희생당한 단원고 학생들의 교실을 남겨야 한다는 입장과 이를 새로운 학생들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입장이 뜨겁게 또는 차갑게 맞부딪하는 작품으로, 의자에 앉아도 그 교실을 가운데 두고 둘러앉아서 관람해야 하는 구조다.
일제강점기 수화물 취급소로 쓰이다가, 해방 이후 미군의 철도수송관인 RTO로 사용되던 공연장은 구조물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 날 것의 느낌이 극 중 등장인물들의 생생한 감정을 그대로 전한다.
최진아 극단 놀땅 대표가 연출한 이 연극은 루마니아 바벨 페스티벌 연출가상'을 받은 작품으로, 관객들을 실제 연극에 끌어들인다. 지난해 5월 LG아트센터에서 공연한 토마스 오스터마이어가 이끄는 독일 베를린 샤우뷔네 극장의 사회토론극 '민중의 적'처럼 관객들이 토론에 참여할 수밖에 없다. 21일 마지막 공연에서 토론자로 나선 3명은 참사가 되풀이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교실을 남겨둬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연계는 이머시브 열풍
'오이디푸스 - 알려고 하는 자'는 세계적으로 보편화·확산되고 있는 공연 형식 '이머시브 연극(Immersive Theater)'을 떠올리게 한다. 무대와 객석이 사라진 형태로, 일반적으로 관객들이 공연장을 자유롭게 돌아보면서 둘러보거나 참여할 수 있는 형식의 작품을 가리킨다. 해외에서는 '슬립 노 모어(Sleep No More)'가 대표적이다. 호텔을 셰익스피어의 맥베드라는 가상공간으로 재탄생시켰다.
국내에서 점차 이머시브 공연 형태의 작품이 늘고 있다.
서울문화재단(대표이사 주철환) 남산예술센터는 오는 29일부터 내달 3일까지 남산예술센터에서 아트선재센터와 공동제작한 '천사 - 유보된 제목'(연출 서현석)을 선보인다.
60분 동안 한명의 관객이 극장을 돌아보는 특별한 형식의 작품이다. 하루 40명의 관객만 관람이 가능하며 예매를 통해 사전 예약된 시간에만 공연이 진행된다.
러닝타임 동안 평소에 접근할 수 없었던 장소들을 대면하게 된다. 공연의 마지막 부분에서 가상현실(VR)을 통해 그동안 살펴본 공간을 다른 관점으로 다시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서울예술단은 내달 21일~30일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운영하는 중구 CKL스테이지에서 김연수 작가의 동명소설(2001)이 바탕인 창작가무극(뮤지컬) '꾿빠이, 이상'(연출 오루피나, 작곡·음악감독 김성수)을 공연한다.
스물일곱에 요절한 천재 시인 이상(1910~1937·김해경)과 그를 둘러싼 인물들이 이상의 삶과 죽음에 얽힌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작품인데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허무는 새로운 형식으로 눈길을 끈다.
관객들이 작품 안에 적극적으로 들어가 공연을 완성하는 이머시브 공연의 하나다. 객석의 변형이 가능한 블랙박스 시어터로 조성된 CKL스테이지 공간을 100% 활용한 무대를 선보인다.
27일까지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3관에서 공연하는 캬바레 뮤지컬 '미 온 더 송(mee on the song)'은 부부인 배우 이영미와 연출 김태형이 공동 창작한 작품으로, 관객이 일정 부분 참여한다.
블루 벨벳 라이브 클럽이라는 공간에서 클럽 가수인 미(mee)가 한 타임의 공연을 진행하는 형식으로 꾸며진다. 원형 테이블 등을 놓고, 실제 맥주 등을 마실 수 있게끔 공연장 내부를 꾸몄다. 관객들이 쓴 쪽지를 이영미가 공연 도중 읽기도 한다.
이미 이머시브 공연 형태가 대학로에서 눈길을 끌고 있었다.
지난 6월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관객참여형 공연의 하나로 선보인 관객참여형 씨어터 RPG 1.7 '내일 공연인데 어떡하지'는 대학로 예술극장 백스테이지를 포함해 극장의 전역을 이동하면서 진행되는 새로운 '백스테이지 + 극장투어' 형식의 공연으로 호평 받았다.
'내일 공연인데 어떡하지'의 김태형 연출은 "객석과 무대가 분리돼 제4의 벽이 존재하는데 관객이 공연 체험을 하면서 그것이 부셔지기를 바랐다"며 "동시에 삶의 벽이라는 한계와 아픔들 용감하게 두드려볼 수 있는 용기를 줬으면 했다"고 말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지난해 헤드폰을 낀 관객들이 대학로 구석구석을 탐방하는 '대학로 활용 관객 참여형 공연'인 '로드씨어터 대학로'를 선보이기도 했다.
◇이머시브 공연은 무엇?
단순 관객 참여형 공연은 대학로에 이미 존재했다. 대표적인 오픈런 공연으로 관객들이 범인을 잡는 추리 형태의 '쉬어 매드니스'가 대표적이다. 엄밀히 말해, 요즘 부상하는 이머시브 형태의 공연 범주에 포함시키기는 힘들지만 넓게 보면 이 형태로 포함시켜도 무방하다.
이머시브 공연은 이미 해외, 특히 유럽 등지에서 보편화된 공연 형식이다. 이 공연 형식을 어떻게 정의하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보통 단순히 관객 참여형 공연과는 구분하는 것이 보통이다.
예컨대 '천사 - 유보된 제목'처럼 관객이 낯선 장소 혹은 익숙한 장소에서, 그 장소를 낯설게 느낄 수밖에 없도록 두 눈을 가린 채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여정을 떠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식이다. 이 작품은 관객이 직접 걸으며 현장과 유기적으로 어우러지는 상황을 경험하는 장소특정 퍼포먼스다.
이 평론가는 "아직까지 국내에서 관객 참여형과 뚜렷하게 구별되는 형식은 아닌데, 기존 공연과 다르게 극장과 관객을 바라보고 정형적인 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새로움 때문에 점차 시도가 늘어나는 것"이라고 봤다.
◇이머시브 공연 왜 늘어날까?
공연계에 이머스브 형태의 공연이 늘어나는 것에 대해 공연 칼럼니스트 권혜은(대학내일 에디터)은 관객의 취향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에서 찾았다.
권 칼럼니스트는 "요즘에 인기 있는 인터넷 게시물만 봐도 대중의 취향이 변화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면서 "가령 유튜브 채널에서도 일반적이 영상이 아니라 (유튜브에 자신의 일상을 생중계하는) '브이 로그'를 통해 실시간으로 소통하고 공유하는 현상이 유행인데, 그런흐름이 공연계에도 반영된 것 같다"고 봤다.
또 "오프라인에서는 전국적으로 방탈출 게임이 유행"이라면서 "특정한 장소에 힌트 등을 채워놓고 체험 위주의 놀이가 홍대와 강남역 위주로 늘어나는데 현재 이머시브 공연 형태의 흐름과 비슷하다"고 덧붙였다.
결국 공연도 변화하는 흐름에 맞물려 변화하는 동시에 수많은 볼거리, 놀거리와 경쟁 체제에 돌입했다는 이야기도 된다.
이런 특별한 경험은 생생한 현장성이 특징인 공연의 즉흥성이 강조되는 형식으로도 선보이고 있다. 지난 4월 '오늘 처음 만드는 뮤지컬'은 배우들이 대본 없이 관객들의 즉흥적인 주문으로 극을 만들어가 대학로에서 화제가 됐다.
내달 대학로 일대에서 펼쳐지는 '2017 서울국제공연예술제'(스파프·SPAF) 프로그램 중 하나로 선보일 '하얀 토끼 빨간 토끼'(9월 21~24일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는 리허설, 연출, 무대 세트 없이 오롯이 배우와 관객만으로 구성되는 극으로, 대본 역시 공연 직전 배우에게 공개되는 1인극이다. 손숙, 이호재, 예수정, 하성광, 김소희, 손상규 등 걸출한 배우들이 대거 나와 이미 티켓 판매율이 높다.
권혜은 칼럼니스트는 "공연뿐 아니라, 콘텐츠 전반에서 예측이 불가능한 전개 또는 직접 체험하는 것에 대한 호응이 크다"면서 "이머시브 공연이 부흥하는 것도 이러한 흐름, 관객의 성향과 맞아떨어진 것"이라고 봤다. "사실 10~20대 사이에서 공연은 티켓 값이 비싸고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인식이 있어 공연 보는 걸 귀찮아 여기기도 한다"면서 "다양한 체험을 안기는 이머시브 공연은 이런 관객에게 일종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경미 연극평론가는 "기존 제도적인 극장과 다른 새로운 형태의 공연을 선보이는 건 공연계의 전체적인 발전을 위해서라도 적절한 문제제기"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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