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작가 배삼식(47·동덕여대 문예창작과 교수)은 훌륭한 기술자(技術者) 겸 기술자(記述者)다. 수공업적인 장인이라는 뜻이 내포된 '플레이 라이트(play wright)' 영역에서 매끈한 극작법, 즉 기술(技術)을 갖고 있는 작가다. 아울러 우리의 기억과 역사의 기록을 남기는 기술(記述)에 대해서도 누구보다 성실하게 임한다.
국립극단(예술감독 김윤철)과 손을 잡고 오는 5일부터 30일까지 명동예술극장 선보이는 그의 신작 연극 '1945'(연출 류주연)는 그 정점에 놓인 것으로 보인다.
1945년 해방 직후 만주가 배경이다. 이곳에 살던 조선 사람들이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전재민(戰災民) 구제소에 머물며 기차를 타고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간 우리 기억이 미처 머물지 못했던 부분에 대한 기록이다.
최근 서계동 국립극단에서 만난 배 작가는 '1945'를 준비하면서 "우리의 현재를 만들어놓은 기원으로서 가까운 과거에 대한 형상이라는 것이 너무 빈약하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근래의 작품만 살펴봐도 기억은 배 작가의 이야기가 굴러가는데 중요한 땔감이다. '3월의 눈'에서 노부부의 기억은 점점 뜯겨져 나가는 그들의 오래된 집처럼 멀어져가는 상실과 죽음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기억을 상실한 여자와 그 남편의 이야기인 '먼 데서 오는 여자'는 각종 기억과 기록에 대한 메타포였다.
"'3월의 눈'은 6·25를 거쳐 1950년대 청년들이었던 우리 아버지·어머니 세대에 대한 이야기였어요. '먼 데서 오는 여자'는 50년대에서 태어나 산업화 시대를 보내 그 후세대의 이야기였죠. 이 이야기들을 쓰면서 과거 이야기가 단지 회고담이나 골동품이 아니라 현재를 바라보는 창이 돼 주기도 한다는 걸 알았죠. 과거의 기억을 무대 위에서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는 것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든 겁니다."
배 작가가 이른바 '영점지대'인 1945년을 구체화한 이유가 있다. 지금 발생하는 문제들의 원인인 그 시대에 대해 추상적인 이해만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45년'을 선택해서 막상 글을 쓰려고 생각하니까 아는 것이 없더라고요. 닥치는 대로 그 시대의 기사와 소설을 읽으며 그 내용에 빚지게 됐죠. 그 시대 삶의 구체적인 양상이라는 것이 어떤 것일까 기억하는 과정이었죠. 특히 당시 에세이, 수필은 그 당시의 중요한 기억을 나눌 수 있게 했죠."
염상섭, 김만선, 허준, 채만식 등의 작품을 보면서 1945년 전후는 지금 그 시대에 대한 가치를 평가하는 단순한 논법보다 훨씬 더 다층적이라는 걸 깨달았다.
위안소를 탈출한 명숙 그리고 그녀와 함께 죽을 고비를 같이 넘긴 미즈코뿐만 아니라 10여명의 인물들이 따로 주조연할 것 없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이유다. 여기서 특정한 정체성으로 이들을 묶을 수 없게 된다.
배 작가는 하지만 이전 작품들처럼 인물들을 쉽게 판단하지 않고자 했다. 최대한 그들의 삶에 구체성을 담고자 한 까닭이다.
"섣부른 가치 판단 앞에서 망설이거나 머뭇거리게 됩니다. 모든 인간은 아마 스스로 나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자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자신의 존재가치가 정당하다고 여기면서 행동하죠. 작가로서, 온전히 객관적일 수는 없지만 특정한 틀에 가둬놓고 극을 쓰는 건 지양하려고 해요."
서울대 인류학과를 졸업하고 한예종 연극원 극작과에서 전문사 과정을 밟은 배 작가는 학생 때인 1998년 '하얀 동그라미 이야기'로 데뷔했다. 이후 손진책 전 국립극단 예술감독이 이끄는 극단 미추, 국공립극장들과 작업하며 이름을 알렸다.
김동현(1965~2016) 연출이 이끈 극단 코끼리만보와 작업도 그의 중요한 이력이다. 배 작가와 김 연출이 호흡을 맞춘 '하얀앵두'(2009) '벌'(2001) 그리고 '먼 데서 오는 여자'는 근래 연극 중 최고 수작으로 손꼽힌다.
배 작가는 올해 말 김 연출을 기억하는 코끼리만보 연작(12월 5~25일 두산아트센터)에서 신작을 선보인다. 제목은 '오후만 있던 일요일'(가제). 명반으로 통하는 록그룹 '들국화'의 1집 '행진'(1985)의 수록곡에서 따온 것으로 기타리스트 이병우가 작사·작곡했다. 김 연출이 살아생전 가장 좋아했던 곡 중 하나다.
"마치 오후에 눈을 뜬 것처럼 이 세계에 늦게 당도하는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에요. '먼 데서 오는 여자'와 다른 내밀한 개인의 이야기가 모티브가 되겠지만 형의 평전은 아니죠. 그런 식의 작품을 원할 거 같지도 않고. 항상 이 세계에 늦게 도착하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죠."
배 작가의 작품의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결국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는 점이다. 항상 공감대가 큰 희곡을 써온 만큼 국립극단은 이번 '1945'를 희곡선으로 내놓는다. 자체 제작공연으로는 처음이다.
배 작가는 거리를 두고 글을 쓸 수 있다는 점을 다른 장르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희곡만의 매력이라고 했다. "제 목소리가 수많은 목소리 중 하나가 될 수 있죠. 전체가 아닌 부분으로 거리를 두고 볼 수 있다는 거예요. 글을 쓸 때마다 배우랑 똑같은 심정이 되요. 이 사람이라면 무엇을 원할까라는 고민을 하는 거죠. 이 생각과 행위가 최선인가라고 말예요."
realpaper7@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