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대표적 록스타 그레그 올맨(69) 타계..전설적 올맨브러더스 밴드 창시자

기사등록 2017/05/28 07:24:08
【AP/뉴시스】 = 2011년 고향인 테네시주 내쉬빌에서 열린 45회 CMA상 시상식장에 온 그레그 올맨(AP자료사진).  미국 서던 록의 대표악단인  올맨 브러더스 밴드를 창시한  기타리스트 겸 가수였던 그는  27일 간암으로 숨졌다. 
【서배너 ( 미 조지아주) = AP/뉴시스】차미례 기자 = 미국 남부의 서던 락을 대표하는 그래미상 수상 악단 올맨 브러더스 밴드(Allman Brothers Band)의 그레그 올맨이 27일(현지시간)  조지아주 서배너의 자택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숨을 거두었다고 그의 매니저가 발표했다.  향년 69세.

 매니저인 마이클 레먼은 올맨의 사인이 간암이라고 언론에 밝혔다.  올맨은 최후까지 연주활동을 하기 위해서  암에 걸린 사실을 비밀로 하고 있었다고 그는 말했다.

 올맨은 지난 해 10월 공연을 마지막으로  그 이후에 예약되어있던 연주회는 건강 때문에 모두 취소해야했다. 그는  8월 5일 자신이 "중대한 건강상의 이유로 마요 병원에서 의사의 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라고만 밝혔다.  이후 목수술을 받는다며 사람들과의 면담을 모두 취소했고,  올해 3월에는 2017년 중에 예정되어 있던 공연들도 모두 취소했다.

  숨진 그렉 올맨은 아직 장례일정은 확정되지 않았지만 유언대로 거의 반세기 전(1969년) 밴드를 출범시켰던 조지아주 메이컨 시의 로즈 힐 묘지에 있는 기타리스트였던 형 듀에인 올맨의 곁에 나란히 묻히게 된다.   

 같은 서던 락과 컨트리 뮤직의 찰리 대니얼스는 트위터에 "그레그 올맨은 블루스에 탁월한 감성을 가진 희귀한 존재였다.  그의 훌륭한 목소리가 멈췄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고 올렸다.

 테네시주 내쉬빌에서 태어난  이 록스타는 금빛 장발로 유명했으며 아버지가 총격으로 사망한 뒤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형 듀에인을 우상처럼 여겨, 결국 형을 따라서 여러 밴드에 참가했고,  함께 올맨 브러더스 밴드를 조직해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이 밴드는 1969년 1집 데뷔 앨범 (The Allman Brothers Band) 을 냈고 1995년 그래미상  최우수 락 연주상을 받았다.  1995에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될 정도로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

  초기 밴드는 듀에인 올맨과 디키 베츠의 기타화음과 폭넓은 음역의 연주,  두 명의 드럼연주자의 강한 비트와 그레그 올맨의 묵직한 보컬로 서던 록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레너드 스키너드 같은 록스타와 마샬 터커 밴드 같은 다른 서던 록 밴드들을 위한 진로를 열어주었다는 평을 듣고 있다.

  초기 그레그의 대표적 노래로는  "휘핑 포스트"(Whipping Post)  "램블린 맨"(Ramblin' Man)   "미드나잇 라이더"(Midnight Rider) 등이 있다. 

【AP/뉴시스】 = 2005년도 투어 중 아이오와주 카운슬 블러프에서 연주하는 그레그 올맨.  그는 70년대에 오토바이 사고로 숨진 명성 높은 기타리스트이자 가수인  듀에인 올맨의 곁에 안장된다고 그의 매니저가 밝혔다.  
  그는 2012년 회고록 " 내가 진 십자가"( My Cross to Bear )에서 아버지가 술집에서 만난 어떤 남자에게 살해된 후 그의 평생의 삶의 중심인물은 형 듀에인이었다고 밝혔다.  둘은 함께 육사 진학에의 꿈을 불태웠다가 10대의 나중에는 록 음악의 광풍에 휘말렸다.  먼저 기타를 잡은건 그레그였지만 나중에는 형이 월등히 뛰어난 기타리스트로 명성을 날렸고 그레그는 나중에 오르간 연주자로 바꿨다.

 이들을 최고 스타로 만든 건 데뷔앨범이 아니라 1971년에 낸 "필모어 이스트에서"(At Fillmore East)였다.  이후 밴드는 인기의 정점에 올랐고 듀에인은 자신의 악단 뿐 아니라 아레사 프랭클린, 윌슨 피켓, 에릭 클랩턴과 함께 세션작업을 하면서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떠올라 팬들의 열광적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필모어 공연의 녹음 음반을 낸지 불과 몇달 후인 1971년 10월에 오토바이 사고로 숨졌다. 다음해에는 악단 멤버중 오클리도 같은 사고로 사망해 그레그는 평생 불운과 상심에 시달렸다.

 2012년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그레그 올맨은 자신은 평생 형을 매일처럼 마음에 간직하고 살아왔으며 가끔씩은 실제로 그의 존재를 확실히 느끼기까지 한다고 말했다.

 올맨은 1975년 역시 록가수인 셰어가 함께 듀엣활동을 하던 남편 소니 보노와 이혼한 뒤에 그녀와 결혼했다.  하지만  9일만에 이혼요구를 받았다가 한 달 뒤 철회될 정도로 결혼생활은 처음부터 순탄치 않았다.  그러나 둘이 함께 낸 앨번 "올맨과 여자"는 크게 히트했고  아이까지 낳았지만 결국 1977년 헤어졌다.  

 셰어는 그의 부음을 듣고 27일 "나는 노력했다. 뭐라고 말하기 불가능하다"라고 트위터에 올렸다.

 1980년대에 해산한 올맨 브러더스 밴드는 그 이후 오랜 세월에 걸쳐서 여러 차례 재구성과 재활동을 전개해왔으며 창립 20년이 넘은 1990년대 부터는 다시 새로운 멤버, 새로운 음악으로 새 팬들을 만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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