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주사는 추존왕 장조(사도세자)의 묘소인 융릉(전 현륭원)의 능침(陵寢) 사찰, 즉 왕과 왕비의 능침을 수호하고 명복을 비는 절로 쓰인 곳이다. 제사 물자를 준비하기 위한 조포사(造泡寺) 구실을 했다. 능이나 원(園)에 딸려서 나라에서 지내는 제사인 제향(祭享)에 쓰는 두부를 맡아 만들고 제사 물자를 조달하는 사찰이 조포사다.
1790년 2월19일 공사를 시작해 4월15일 상량(上樑·上梁), 즉 기둥에 보를 얹고 그 위에 처마 도리와 중도리를 걸고 마지막으로 마룻대를 올렸다. 9월29일 불상이 봉안됐다. 왕실이 공사를 발주하고 관청이 재원을 조달하는 등 건립 계획부터 공사 감독까지 일관되게 국가가 주도한 관영공사다. ‘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현륭원의궤’, ‘조선사찰사료’ 등 관련 사료를 통해 공사 내용과 재원, 집행, 인력 등 전모를 파악할 수 있다.
대웅보전은 용주사의 주불전으로 여러 번 중수했다. 외부 단청을 제외하고는 처음 지었을 때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多包系) 팔작지붕으로 18세기 불전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양 측면에 삼각형 모양의 합각면이 있는 지붕이 팔작지붕이다. 장대석(長臺石) 기단(基壇)과 가둥을 두는 원형 주좌(柱座)를 둔 사각 초석, 지붕 용마루의 양쪽 끝에 얹히는 조향인 취두(鷲頭)와 내림마루에 용머리 모양의 장식기와를 올린 용두(龍頭), 지붕마루 전체를 회로 감싼 양성바름 등 시공에 정성을 기울여 능침사찰로서 건물의 격을 잘 나타낸다. 처마 끝의 하중을 받치기 위해 기둥 윗부분 등에 짜 맞춰 댄 다포양식의 구조물인 공포(栱包)와 초각(草刻) 수법은 창건 당시의 시대적 특성을 갖추고 있다.
reap@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