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의 적' 탄압하려다 제 무덤 판 '기춘대원군'

기사등록 2017/01/21 04:09:07 최종수정 2017/01/21 12:46:06
박근혜 정부 2인자, 결국 문화계 블랙리스트로 몰락
 문체부 1급 인사 부당 개입 의혹도 부메랑 작용
 죽은 김영한이 산 김기춘 잡나…고인의 비망록이 쐐기

【서울=뉴시스】표주연 기자 = 박근혜 정부에서 '왕실장'으로 불리던 김기춘(78) 전 대통령 비서실장도 '최순실 게이트'에 결국 발목이 잡혔다. 김 전 실장의 지시를 구체적으로 적어놓은 고 김영한 전 민정수석의 비망록이 결국 김 전 실장에게 구속이라는 굴레를 씌웠다는 분석이 나온다.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김 전 실장을 상대로 블랙리스트 뿐만 아니라 문화계와 검찰에 대한 인사 개입 등 그가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있으면서 직권을 남용한 혐의 전반에 대해 두루 수사할 전망이다.

 ◇박근혜 정부의 2인자, 결국 블랙리스트 의혹으로 구속

 김 전 실장은 '왕실장', '기춘대원군'으로 불리며 박근혜 정권의 최고 실세로 꼽혔던 인물이다. 이 정부에서 벌어졌던 국정농단과 각종 부정행위들이 그의 손을 거쳐 갔을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 많았다. 

 박 대통령 곁에서 당정청을 모두 장악한 실세였던 만큼 최순실(61·구속기소)씨가 청와대를 오가며 국정을 주무르는 과정에도 개입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김 전 실장은 2006년부터 박근혜 대통령을 가까운 거리에서 보좌했다. 2012년 대선에서 김 전 실장은 박근혜 당시 후보의 자문그룹 '7인회' 멤버로 활동했고, 2013년 8월부터 대통령 비서실장을 역임했다.

 게다가 김 전 실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부터 인연이 이어진 인물이다. 김 전 실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 아래서 중앙정보부 대공수사부장, 정보국장, 청와대 비서관을 지냈으며 유신헌법 제정에도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최태민-최순실 일가와 박 대통령의 관계가 수십년동안 지속됐고, 박근혜 정부에서 요직을 맡아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김 전 실장도 최씨 일가의 존재를 수십년 전 부터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1980년대 초 김 전 실장이 최태민씨 측을 만나거나 돌봐줬다는 보도도 수차례 나온 상황이다.

 또 단순히 알고 있는 것에서 벗어나 최씨의 국정농단에도 상당 부분 김 전 실장이 개입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설득력 있게 제기되고 있다.

 박 대통령은 대국민담화를 통해 "(최씨로부터)선거 때 많은 도움을 받았다. 연설문 등에서 도움을 받았다"고 인정했는데, 대통령 선거와 취임 초기 가장 왕성한 활동을 벌이던 '2인자' 김 전 실장이 최 씨의 국정농단에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는 것은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김 전 실장은 줄곧 "최씨를 모른다"고 부인해왔다. '법꾸라지'라는 그의 또 다른 별명처럼 최씨의 국정농단에 관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존재조차 모른다고 발뺌해온 것이다.

 그러나 그의 '발뺌'은 영장실질심사 과정에서 부메랑이 됐을 것으로 보인다. 국회 청문회 과정에서 김 전 실장이 최씨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 증거인멸을 할 우려가 높다는 사실만 확인시켜준 셈이다.

 ◇ 구속 결정타 된 블랙리스트·문체부 1급 인사개입

 김 전 실장에게 결정타가 된 것은 문화계 지원 배제 명단, 이른바 '문화계 블랙리스트'와 부당한 인사개입이었다.

 김 전 실장은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과 문체부 1급 공무원 인사에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문화계 블랙리스트는 정부에 비우호적인 문화계 인사 약 1만명의 명단이 담긴 문서로 알려졌으며, 박근혜 정부는 이 문서에 포함된 인사들을 각종 정부지원에서 배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가 문화·예술계 인사들을 지원을 빌미로 '통제'하려고 했다는 이야기다.

 특검은 국민의 사상의 자유를 침해하는 이 리스트가 김 전 실장의 '작품'이라고 의심하고 수사를 벌여왔다. 특검은 김 전 실장의 지시로 청와대 정무수석실 산하 국민소통비서관실이 리스트를 작성해 문체부로 전달한 것으로 보고 그 경위와 경로를 추적하고 있다. 

 또 김 전 실장은 2014년 김희범 당시 문체부 1차관을 통해 문체부 1급 공무원들의 "사표를 받으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때 사표를 강요받은 고위 공무원들은 문화계 블랙리스트 집행 과정에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 문체부 1급 공무원 6명은 2014년 10월 일괄 사표를 냈다.

  ◇죽은 김영한이 결국 산 김기춘을 잡나

 '법꾸라지' 김 전 실장을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든 결정적인 증거는 고 김영한 전 민정수석의 비망록이었다. 이 비망록에는 김 전 실장의 각종 지시 내용이 빼곡히 적혔으며, 이중 일부는 박 대통령의 지시라고 볼 수 있는 내용도 상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비망록에서 김 전 민정수석은 김 전 실장의 지시 사항을 '장(長)'이라로 명시했다. 비망록의 '장'은 세월호 유가족 김영오씨의 단식을 두고 '자살방조죄, 단식은 생명 위해행위이다. 국민적 비난이 가해지도록 언론지도'라는 지침을 내렸다.

 또 '장(長)'은  '정윤회 문건' 사건이 불거지자 이재만·안봉근·정호성 등 이른바 '문고리 권력 비서관 3인방'의 소환과 통화 내역, 이메일 압수 수색 등을 검찰과 협의하고, 정윤회 문건 내용이 허위라고 주장하라고 지시했다. 

 이미 특검은 이 비망록을 손에 쥔 상태다. 김 전 실장과 박 대통령을 한꺼번에 사정권에 넣는 중요 증거를 확보하고 있는 셈이다. 

 향후 수사과정에서 이 비망록에 씌여진 내용이 실제 정책에 반영됐는지 확인될 경우 특검의 칼날은 정치·경제·사회·문화 전 분야로 확대될 수 있다. 이럴 경우 '장(長)'으로 지목되고 있는 김 전 실장은 빠져나갈 구멍이 별로 없는 상황이다.

  pyo000@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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