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하 친일 매국노 주장은 억측"…김희찬씨 반박

기사등록 2016/09/06 14:01:59 최종수정 2016/12/28 17:36:40
【충주=뉴시스】강신욱 기자 = 2일 오후 충북 충주문화원에서 열린 '권태하, 스포츠독립운동가인가 친일매국노인가'를 주제로 권태하친일행위진상규명 충주시민대책위원회가 주최한 공개토론회에서 독립운동가 류자명 선생의 손자인 류인국(오른쪽) 나무식물병원장이 발표하고 있다. 왼쪽은 사회를 맡은 박만순 충북역사문화연대 대표. 2016.09.02.  ksw64@newsis.com
【충주=뉴시스】강신욱 기자 = 충북 충주 출신 마라토너 권태하(權泰夏·1906~1971)를 재조명한 비영리단체 '아이들의 하늘' 주비위원회 간사 김희찬씨는 "권태하가 친일 매국노라는 주장은 억측"이라고 정면 반박했다. <뉴시스 9월 2일 보도>

 김씨는 독립운동가 류자명(柳子明·본명 유흥식·1894~1985) 선생의 손자인 나무식물병원 원장 류인국씨가 지난 2일 권태하를 친일 매국노라고 주장한  것에 6일 보도자료를 내고 반론을 제기했다.

 김씨는 "류씨의 주장엔 자료 인용 내지 해석의 오류와 제시한 주제에 억지로 끼워맞춘 점 등 크게 두 가지 심각한 문제가 있다"며 류씨의 발표를 조목조목 비판했다.

 김씨는 "류씨는 1933년 상황에서 권태하가 복천만(福川滿·후쿠카와 미츠루)으로 창씨개명했고, 계림회(鷄林會)를 조직했으며, 남만주철도주식회사에 자발적으로 입사해 호의호식했다고 전제했다"며 "류씨는 2004년 본인이 인터뷰한 권태성씨의 녹취록을 중심으로 가설을 펼쳤지만, 창씨를 1933년 상황으로 억지 해석해 가설에 끼워 맞추는 심각한 오판을 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창씨라는 게 권태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충주에 백형(맏형)이 있고 서울에 중형(둘째 형)이 있는 상황에서 막내인 권태하가 임의로 바꾼 것이 아니다"며 "류씨가 일본국회도서관에서 찾았다는 만철 인사록에도 1934~1936년 3개년 명단에 분명 권태하로 기록돼 있다"고 반박했다.

 일본육사 조선인 유학생들의 모임으로 시작했다는 계림회 성립 과정에 권태하는 없음에도 류씨가 권태하를 친일 매국노의 수괴로 만들기 위한 논리를 펴는 것으로 비판했다.

 김씨는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 상무위원들이 있던 만주 지역 도시 이름을 '만주계림회'라고 억측하면서 앞으로 밝혀야 할 숙제라고 교묘히 말을 돌리고 있다"고 꼬집었다.

 김씨는 권태하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근거가 무엇이냐는 류씨의 공개 질문과 관련해서도 "권태하는 일장기를 달고 뛴 것에 대해 '남의 옷을 빌어 입고도 저의 옷을 찾아 입기 위해 노력할 수가 있다. 조선의 운동이 세계에 알려지고 세계 민중이 조선을 알고 조선의 운동가를 동정할 때 나는 그 사람들의 힘을 빌어 나의 옷을 찾아 입을 수가 있다고 믿고 있다'며 왜 일장기를 달고 뛸 수밖에 없었고 무엇을 하려 했는가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씨는 "권태하가 스포츠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은 일장기 말살 사건을 주도한 동아일보 이길용 기자를 통해 기록된 1932~1936년의 수백 편 신문기사를 종합하고 분석하면 확인되는 일"이라고 권태하의 스포츠 독립운동가 주장을 거듭 밝혔다.

 김씨는 앞서 지난 2일 충주문화원에서 권태하친일행위진상규명 충주시민대책위원회 주최로 열린 '권태하, 스포츠 독립운동가인가, 친일매국노인가'란 주제의 공개 토론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김씨가 불참한 이날 상대 토론자인 류씨는 '권태하 복천만 그는 일본인이다'란 발표문에서 "권태하는 남만주철도주식회사(南滿洲鐵道株式會社·이하 만철)에서 근무하고 대동아성병본부(大東亞省竝本部)에서 활동한 일본인으로 살고 싶어 한 친일 매국노"라고 주장했다.

 그는 권태하의 친일 매국노 단초는 1933년 후쿠카와 미츠루란 일본 이름으로 창씨개명하고 일본 여인과 결혼 후 중국 만주 만철로 갈 때이고, 가장 뚜렷한 친일 매국노 족적은 대동아성병본부 촉탁으로 활동한 1944년"이라고 밝혔다.

 이어 "권태하가 촉탁으로 몸 담았던 대동아성병본부는 여성들을 강제로 또는 미끼로 동원해 중국과 남양군도 등에 성노예로 보냈고 젊은 청년들을 전선의 총알받이로 보냈다"며 권태하의 친일 성향을 지적했다.

 매일신보 1944년 1월15일자에 실린 권태하의 대동아성병본부 촉탁 부임 인사를 근거로 제시했다.

 ksw64@newsis.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