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향의 아비는 누군지 알 수 없고, 어미는 최하층 기생이다. 태생적 한계를 지닌 춘향의 신분이 '절개' 하나로 하루 아침에 양반계층으로 급상승한다. 당시 조선에서는 꿈조차 꿀 수 없는 암행어사의 정부인이 됐다. 유리천장을 뚫은 셈이다.
음력 4월 8일은 부처님 탄신일이자 춘향의 생일이다. 남원 시민들에게 있어 이 날은 춘향에게 제를 올리는 춘향제 첫날이다. 춘향제는 1931년 춘향의 사당을 건립해 제사를 지내면서 시작됐다. 몽룡과 춘향이 만난 단오에 지내다가 1934년 농번기를 피해 춘향의 생일로 정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우리 민족의 애환을 달래주는 구심적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일제는 이 축제가 조선제국의 잠자는 민족혼을 일깨워 줄 것을 우려해 갖은 탄압을 자행했다. 이 때문에 야간에 제사를 지내야 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학생들은 이날 가장행렬을 통해 춘향이 되고 몽룡이 된다. 남원시민은 이 축제가 곧 자신들의 잔치다.
춘향가, 흥부가 등 판소리 동편제의 본향인 남원에서 1950년 도입된 명창대회는 1974년 전국판소리명창대회로 발전하면서 이제 명창의 등용문으로 굳어졌다. 춘향제는 그 규모 면에서도 전국 축제 중 으뜸이다. 각지에서 몰려오는 관광객만 4일 동안 75만 명이다. 이들이 지역에 직접 뿌리는 돈은 350억 원, 경제적 파급효과는 수 천억 원으로 추산된다.
1962년 주천면 육모정 인근에서는 '성옥녀지묘(成玉女之墓)'라는 지석이 발견됨에 따라 이곳을 성춘향 묘로 단장했다. 광한루 정문 왼편에는 '춘향관'이 새롭게 들어섰다. 소설 속 춘향을 디지털 병풍 속 이미지를 통해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춘향제 역사를 담은 포스터와 사진, '춘향전'을 기반으로 제작된 영화, 뮤지컬, 오페라, 창극 등 춘향 관련 다양한 정보를 이곳에서 제공한다.
그렇다면 이몽룡은 어떨까.
성이성의 부친 성안의는 임진왜란 때 창녕에서 의병 5000명을 모집해 왜적과 싸운 명문 귀족이다. 남원부사, 광주목사, 사성 등을 지냈다. 이괄의 난 때는 왕을 공주로 호송하는 임무를 맡은 최측근이었다. 죽어서는 이조판서, 대제학에 추증됐다. 한마디로 이몽룡은 태생이 금수저다.
성이성은 5남 3녀를 뒀다. 그 중 장남 성갑하가 인근 닭실에 살던 권씨 처자와 결혼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일이 있었다.
13대 종손 성기호(75)씨에 따르면 하루는 성갑하의 장인이 딸의 얼굴도 볼 겸 사위 집에 다니러 왔더니 갓 시집온 딸이 끼니조차 굶고 있었다. 장인은 하룻밤을 그곳에서 머물면서 밤새 고민했다. 결국 이튿날 10리에 이르는 넓은 뜰을 사위에게 나눠줬다.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없던 성갑하는 처가의 도움을 받고서야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청백리 계서 성이성 유물 특별전시회'를 열고 어사화와 어사출도 때 사용한 얼굴가리개인 사선 등도 공개했다. '이몽룡 실존인물 성이성을 활용한 지역문화산업 활성화 방안'을 주제로 포럼도 준비했다. 지난해는 장원급제 음악회도 열었다. 하지만 행사장을 찾은 관광객은 1000여 명 내외에 불과했다.
올해 86회 행사를 치른 춘향제의 예산이 15억 원인데 비해 3회째를 맞는 계서문화제의 예산은 3500만원이 전부다. 생가를 찾는 관광객들이 먹고 쉬며 즐길 공간도 아직은 마땅치 않다. 상황이 그렇다보니 '청백리 이몽룡'으로 인한 봉화지역의 경제적 파급효과는 극히 미미한 수준이다.
결국 그 옛날 장남 성갑하가 그랬듯이 오늘날 이몽룡도 처갓집의 도움 없이는 가난에서 쉽사리 벗어날 수 없을 듯 싶다. (사)이몽룡·성이성 기념사업회의 한 관계자는 "춘향전을 중매쟁이 삼아 처가의 바지 가랑이라도 붙잡고 늘어져야 하는 것 아니냐"라고 말했다. 80여 년에 걸쳐 춘향제를 이만큼 성장시킨 남원시의 축제 노하우 등을 벤치마킹해 하루빨리 봉화에 접목시켜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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