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간송본, 오자도 안 잡고 모르는 척”

기사등록 2015/11/30 08:03:00 최종수정 2016/12/28 15:59:29
【서울=뉴시스】세종대왕의 서문(1장 앞면), 국보 제70호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
【서울=뉴시스】신동립 ‘잡기노트’ <558> 쾌거, 훈민정음 어제서문 75년만에 복원①

 민족의 문자경전인 ‘훈민정음(訓民正音)’을 빼놓고 문화융성을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연산군의 탄압 이후 수백 년 동안 종적을 감춘 훈민정음 해례(解例)본이 1940년 기적적으로 나타났다. 이전까지 조선총독부는 훈민정음을 거듭 왜곡했다. 이후 75년이 흘렀다. 불행히도 그 책의 맨 앞부분 어제서문(御製序文) 두 장, 4쪽 분량은 처음부터 낙장 소실됐다. 정밀 복원은 학계의 숙원이다.

 간송(澗松) 전형필에게 넘기기 전, 낙장 부분을 최초 복원한 사람은 당시 경학원 김태준 교수와 제자 이용준이다. 그들은 낙장 사실을 공개하지 않은 채 원본인 것처럼 보이도록 은밀하게 보수했다. 판매가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남아있는 고색창연한 원본과 유사하게 만들려고 글씨 부분은 안평대군체에 조예가 있던 이용준이 맡았다. 이용준은 선전(鮮展)에 입선한 서예가다. 한지는 소죽솥에 삶아 누런색을 띄게 만들고 원본 고서처럼 비슷하게 재단해 꿰맸다.

 수작업 만으로 최초의 복원 작품이 탄생됐다. 이 사실을 1940년 7월30일 ‘원본 훈민정음의 발견’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한 조선일보는 ‘耳(이)’를 ‘矣(의)’로 오기하는 등 치명적 결함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간송이 사들인 해례본을 보고 홍기문과 송석하가 모사본을 만들었다. 이를 바탕으로 방종현은 조선일보에 8월4일까지 5회에 걸쳐 해례본의 내용을 번역 연재했다. 학계에 큰 반향이 일었다. 박승빈이 이끄는 조선어학연구회는 이 소식을 전국 회원들에게 전파하고자 1940년 10월15일 ‘정음(正音)’지에 ‘훈민정음’이라는 제하로 조선일보가 소개한 것(日用矣)을 그대로 게재했다.

 정철의 증언(1954)에 따르면, 많은 이들의 관심으로 간송이 해례본을 공개하게 됐는데 최현배는 그것을 보고 쉽사리 권두(卷頭) 보수한 것을 판별했을뿐 아니라 ‘耳’를 ‘矣’자로 잘못 쓴 것까지도 다 알게 됐다. 그런데도 한글학회의 전신인 조선어학회는 오기(誤記) 등에 대한 아무런 교정 없이 1946년 간송본을 그대로 영인해 펴냈다. 그 후에도 이 오기 부분을 소홀히 하거나 신뢰한 실책은 계속됐다. 1962년 간송본은 국보 제70호에 등재되는데, 해례본 간송본 중 세종대왕의 서문 부분을 포함한 2장의 위작 부분까지도 국보의 지정범위에 포함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후 간송본 첫 장의 오류 사실이 점차 널리 알려지게 됐다. 하지만 1983년 안춘근의 논문에 따르면, 1940년 당시 보수작업에 상당히 공을 들인 탓에 보수한 것은 2장이 아니라 1장뿐이라는 착각을 오랫동안 불러 일으켰다. 이와 같은 오류를 포함한 여러 문제점을 깊이 인식하고 바른 복원을 위한 거의 정확한 시안을 제시한 이는 1·2대 국립국어연구원장을 지낸 서울대 안병희 교수다.

【서울=뉴시스】훈민정음 간송본 중 세종 서문, 기념우표(2000)
 1986년 논문 ‘훈민정음해례본의 복원에 대하여’에서 그는 교감 작업을 세 부분으로 분류했다. 첫째는 세종의 서문 제목을 ‘훈민정음’에서 ‘어제(御製) 훈민정음’으로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 둘째는 4성 표시를 해야 할 글자들에 관한 것, 셋째는 구두점과 행관(行款)에 대한 것이다. 안 교수는 치밀한 논리와 함께 다음과 같이 하나의 시안으로서의 복원안을 제시했다.

 御製訓民正音

 國之語音∘異乎中國。與文字

 不相流通。故愚民有所欲言∘

 而終不得伸其情者多矣。予

 爲此憫然新制二十八字。欲 爲(거)

【서울=뉴시스】훈민정음 해례본 낙장 부분 보완안(1997), 동국대 최세화 교수
 使人人易習便於日用耳         易(거)便(평)

 ㄱ。牙音。如君字初發聲。並書∘

 如虯字初發聲 

 2006년 작고한 안 교수는 위 논문 말미에 유언적인 말을 남겼다. “처음 두 장의 낙장을 제대로 복원도 하지 않고 약 50년 전(1940)의 잘못된 보사(補寫)를 그대로 이용함은 부끄러운 일이다. 이 시안은 완전한 것이 아니다. 앞으로 활발한 논의로써 수정되고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의 보사보다는 잘못이 적으리라 믿는다. 완전한 복원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이 시안이 해례본의 이용과 복제에서 참고되기를 바란다.”

 위 제2차 복원안으로부터 11년, 동국대 최세화 교수는 ‘훈민정음 낙장의 복원에 대하여’(1997)를 작성했다. 최 교수는 “훈민정음의 복원에 대해서는 이미 안병희(1986)가 그 오류를 거의 대부분 정확히 지적하고, 다른 영인본의 오류까지도 지적하여 새 복원의 시안을 제시한 바 있다”고 평가했다. 견해를 달리하는 일부 권점(圈點) 부분에 대해 논지를 펴며 복원의 수정 보완안을 제시했다.

 제2차 복원안과는 ①‘국(國)’ 아래의 권점을 구점(句點; 마침표 권점)이 아닌 두점(讀點; 쉼표 권점)으로 한 점 ②‘연(然)’ 아래에 두점을 추가한 점 ③‘자(字)’ 아래의 권점을 구점이 아닌 두점으로 한 점 ④‘편(便)’의 4성(平聲) 표시 권점을 인정하지 않은 점 만이 다르고 나머지는 동일하다.  

【서울=뉴시스】‘便(편)’자들이 보인다, 용비어천가
 안 교수는 논문 ‘훈민정음 해례본과 그 복제에 대하여’(1997)에서 “최근에 최세화(1997)에서도 대체로 필자와 같은 복원이 시도되었다. 늦은 느낌이 있지만, 이러한 논의가 활발히 일어나기를 바라는 우리로서는 매우 기쁜 일로 생각한다”며 환영했다.

 최 교수의 논문을 검토한 박대종 대종언어연구소장 또한 수정 보완된 구두점에 대한 안(案)에 모두 동의한다. 다만, 최 교수가 해례본 중성해(中聲解)의 “ㅣ於深淺闔闢之聲∘並能相隨者∘以其舌展聲淺而便於開口也。”의 ‘便’에 대해 4성 표시를 하지 않은 점을 증거로 들며, 어제서문 중 “便於日用耳。”의 ‘便’에 대해서도 4성 권점을 찍지 않은 점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便’자 부분은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증거로 평성 표시 권점을 찍어야 한다는 안 교수의 견해에 동의한다.

 낙장된 부분을 제외하고 간송 해례본에서 ‘便’자는 앞서 언급했 듯 단 하나의 예만 나타난다. 세종 당시의 ‘便’자에 대한 4성 권점 표시 규칙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해례본(1446) 제작 이듬해에 거의 동일한 필진이 참여해 동일 규칙 하에 제작한 용비어천가를 반드시 살펴야 하는 이유다. 정인지를 필두로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강희안, 이개, 이선로 등 8명이다. 이들 가운데 이선로를 뺀 7명 모두 용비어천가 제작 작업에 참여했다.  

 ‘便’자는 각종 자전에서 확인할 수 있듯 평성과 거성(去聲) 두 가지 성조만 있는 글자다. 용비어천가 1권 40장 뒷면 “不便事狀”의 ‘便’자에는 평성표시 권점이 찍혀 있고, 주석에 ‘安也(편안하다)’고 명기돼 있다. 10권 43장 뒷면의 “四祖便安”에서도 주석 부분에 “便, 亦安也”(편안하다)라고 밝히고 평성 권점을 꼭 찍었다. 반면, ‘便’이 거성으로 ‘곧·문득’을 뜻할 때는 1권 53장 앞면 “便回去”와 9권 24장 뒷면 “便覺渾身”에서처럼 4성 권점을 찍지 않았다.

 박대종 소장은 “이상을 통해 ‘便’자에 대한 당시의 권점 규칙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용비어천가에 나타나는 규칙은 거성인 경우 4성 권점을 찍지 않았고, 평성인 경우 특히 ‘편안하다’를 뜻할 때는 글자 왼쪽 아래 부위에 반드시 권점을 찍었다. 그러므로 훈민정음 언해본에서 ‘날로 편안케 하고저 할 따름이니라’고 명기한 훈민정음 해례본 세종 서문 중 便자는 4성점을 붙여 복원해야 마땅하다. 그리고 ‘너희가 4성7음을 아느냐?’고 일갈한 세종대왕의 뜻에 호응한다면, 해례본 중성해의 문장 ‘ㅣ… 便於開口也’ 중 권점 표시가 없는 便은 당연히 거성이므로 기존의 번역은 ‘작맞다→알맞다’로 재고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계속>

 문화부국장 reap@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