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1년 12월22일부터 1795년 1월7일까지 3년가량 연풍현감을 지낸 김홍도는 1792년(정조 16) 가뭄이 심하게 들자 공정산(公靜山·현 조령산) 상암사(上菴寺)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김홍도는 기우제와 함께 치성을 드려 48세 때 아들(김양기)을 얻었다. '연풍군 공정산 상암사 중수기'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임자년(1792)에 태수 김홍도가 (연풍현에) 부임해 왔다가 가뭄으로 비를 빌기 위해 이 암자(상암사)에 올라 이르기를 "암자의 정결함이 고을 안에서 제일가니 마땅히 그 치성 드릴 곳으로 삼아야겠다"고 하면서 녹봉을 던져 시주를 베풀었다.'
김홍도는 상암사에서 기우제를 지내고 이 절에서 불공을 드린 뒤에 아들을 얻었다.
중수기는 김홍도가 연풍현감에서 물러난 지 한 달 뒤 상암사 계순대사(戒順大師)의 부탁을 받은 풍계거사(楓溪居士)가 지은 글이다. 풍계거사는 김홍도와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이 상암사는 6·25전쟁 당시 이곳에 숨은 인민군을 국군이 포격하면서 지금은 절터만 남았다.
김홍도는 정조의 어진도사(御眞圖寫·임금이 생존했을 때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린 그림) 작업 공로로 연풍현감에 제수됐다.
정조가 김홍도를 연풍현감에 제수한 데는 제2의 외금강으로 일컬어진 단양의 절경을 화폭에 담으라는 뜻도 깔려 있었다고 한다.
김홍도는 1794년에 연풍현이 가뭄으로 기근이 심했을 때 호서위유사(湖西慰諭使)로 파견된 홍대협(1750~1801)이 올린 부정적인 보고서로 현감직에서 물러났다.
괴산군은 김홍도의 역사와 문화를 재조명하기 위해 3억5000만원(도비 1억5000만원, 군비 2억원)을 들여 2013년 12월 연풍면 삼풍리 연풍초등학교에서 천주교 연풍성지까지 길이 220m, 높이 1.6m의 전통 토담을 설치했다.
이 토담을 따라 조성한 길 위에는 16점의 아트 타일과 4점의 동판을 세웠다.
연·풍·연·가를 주제로 생활풍경, 농촌풍경, 놀이풍경, 산수풍경을 배치했다.
동판은 가로·세로 36㎝×75㎝ 2점과 68㎝×75㎝ 2점이고 아트 타일은 1m×1.2m 크기다.
호귀응렵도(豪貴鷹獵圖)를 비롯해 씨름, 산행, 빨래터, 길쌈, 활쏘기, 자리 짜기, 행상 등 그의 대표 작품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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