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깝게도 끝내기에서 나는 큰 곳을 놓치는 최후의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연희가 두고 나자 아차, 하며 한 수만 무르자고 애원이라도 하고 싶었다. 나는 바둑통의 나무 뚜껑을 들어 이마로 힘껏 후려쳤다."(49쪽)
초등학교 5학년 때 바둑에 입문해 중학교 3학년인 현재 아마추어 초단 자격증을 딴 '나'(훈)는 사범님 권유로 시골에서 온 전학생 '연희'와 십번기를 둔다. 나는 충격적인 5연패를 당하며 호선(互先)에서 정선(定先)으로 치수가 깎여 연희를 상수(上手)로 모셔야 하는 치욕적인 상황을 맞이한다.
하지만 풋풋한 열여섯의 소년소녀는 사생결단의 대결 과정에서 사랑에 빠지고만다. 두 사람은 바둑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위로하며 세상을 대하는 태도와 시선을 한층 넓혀간다.
"어떤 마음을 가지려 애쓸 필요는 없고, 차라리 마음을 비워야 해. 승부에 집착하면 손가락에 쥔 돌이 쇠처럼 무거워져. 반대로 마음을 비우면 어느 순간 돌이 반짝거리지. 유리알처럼."(69쪽)
"나는 커서 뭐가 될까…… 사춘기 시절 숱하게 던진 질문의 답안을 나는 성인이 된 지금도 마련하지 못했다. 우리가 누군가에 의해 이 세상에 던져진 돌이라면, 던져진 돌이 자신의 궤적을 스스로 선택하거나 결정할 수 있을지 새삼 미지수로까지 여겨진다. 한 판의 바둑도 결국 수를 저곳에 두지 않고 이곳에 둔 우연이 누적된 결과가 아닐까. 누군가는 그것을 운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167쪽)
소설가 해이수가 등단 15년 만에 두번째 장편소설 '십번기(十番棋)'를 내놨다. 제목의 십번기는 형식론적으로는 '열 판 둬서 세 판을 연속 이기면 치수가 고쳐지는' 시리즈 대결을 의미하지만, 내용적으로는 올인 게임을 의미한다. 단판 승부에선 이길 수도 질 수도 있지만, 사생결단으로 완벽하게 우열을 가리자는 게 십번기 개념이다.
작가는 이 책에서 바둑을, 그것도 '십번기'라는 극한의 기법을 내세워 청소년기 소년소녀의 꿈과 사랑, 번뇌와 성장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냈다. 그는 작가의 말에서 "십대를 거치지 않은 어른은 없으므로 모든 어른은 화흔과 수흔으로 도배된 기억의 방을 한 칸 씩 가지고 있다"며 "무엇보다 이 글을 쓰는 동안 스스로를 많이 이해했다"고 밝혔다. 184쪽, 1만원,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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