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독립운동가 안경신, 6·25전쟁영웅 프랭크 댈리 선정

기사등록 2015/04/30 11:12:56 최종수정 2016/12/28 14:56:27
【서울=뉴시스】독립운동가 안경신 선생.2015.04.30.(사진 = 국가보훈처 제공)  photo@newsis.com
임신한 몸으로 일제 폭탄 투척…부하 모두 살린 전장 영웅

【서울=뉴시스】김훈기 기자 = 국가보훈처는 임신한 몸으로 평양도청에 폭탄을 던진 안경신(安敬信) 선생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30일 밝혔다. 5월의 6·25전쟁영웅에는 프랭크 댈리 미 육군 준장이 선정됐다.

 안경신 선생은 1888년 평안남도 대동에서 태어났으며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평양 만세운동에 참가했다. 임시정부 수립과 함께 전국적으로 항일운동단체가 조직될 때 선생은 대한애국부인회의 교통부원으로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대한애국부인회 조직이 일제경찰에 발각돼 더 이상 활동이 어려워지자 선생은 1920년 중국으로 망명해 임시정부의 군사기관인 광복군총영에서 활동했다. 광복군총영은 1920년 7~8월께 미국의원시찰단의 방한을 계기로 세계 여론에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호소하기 위해 폭탄거사를 실행하기로 했다.

 결사대 중 제2대에 포함된 선생은 폭탄을 직접 들고 평양으로 잠입했다. 거사 분위기 조성을 위해 평양 시내에 뿌린 경고문 탓에 일제 경찰의 경비가 삼엄했다. 그러나 1920년 8월3일 밤 평남도청과 평양부청 등에 폭탄을 투척해 평남도청 제3부인 평남경찰부 건물을 파괴했다.

 선생은 당시 임신한 상태임에도 거사를 주도했으며 출산 직후인 1921년 3월 일제 경찰에 체포됐다. 선생은 사형을 구형받았으나 평양복심법원으로부터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무력 투쟁만이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고 보고 임신부임에도 불구하고 강인한 투쟁정신으로 평양 시내의 일제 통치기관에 폭탄을 투척한 공적을 인정받아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다.

 국가보훈처는 일제 기관을 무력으로 응징하고자 한 선생의 뜻을 기려 5월20일 이북5도위원회 강당에서 공훈선양 학술강연회를 연다. 5월 한 달간 천안 독립기념관과 서울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선생의 생애와 독립운동 활동을 담은 기획사진을 전시한다.

◇6·25전쟁영웅 프랭크 댈리 미 육군 준장

 한편 5월의 6·25전쟁영웅에는 프랭크 댈리 미국 육군 준장이 선정됐다.

【서울=뉴시스】프랭크 댈리(J. Frank Dalley) 미국 육군 준장.2015.04.30.(사진 = 국가보훈처 제공)  photo@newsis.com
 1951년 5월26일 밤 중공군과 교전이 한창이던 경기도 가평의 홍종리 인근, 프랭크 댈리 중령이 이끄는 제213야전포병대대에 미군 제24사단 21보병연대를 포격 지원하라는 임무가 주어졌다. 그러나 포병부대를 경호하던 전투 병력이 적군을 봉쇄하기 위해 전진하면서 포병부대는 전투 병력의 보호 없이 홀로 남겨지고 말았다.

 4000명에 달하는 중공군은 240명의 병력에 불과한 포대가 지키고 있는 좁은 협곡을 돌파구로 삼기 위해 맹렬히 공격해 왔다. 칠흑 같은 암흑 속에서 전투는 백병전 양상으로 전개됐다. 새벽까지 이어진 포화 속에서 협곡을 둘러싼 능선을 오르려고 시도했던 적군은 미군의 공격에 마침내 무릎을 꿇었고 퇴각도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대규모로 투항해 왔다.

 350명의 적군이 전사하고 830명 이상이 생포되거나 투항하는 대기록을 남긴 이날의 전투에서 더욱 놀라운 것은 제213야전포병대대에는 단 한 명의 전사자도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유타주 서밋 출신의 프랭크 댈리 중령은 그 누구보다 병사들의 안전과 운명에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213부대는 모두 유타 주 인근 마을에서 온 600명의 어린 병사들로 이뤄진 부대였기 때문이다.

 당시 부대원은 댈리 중령의 고뇌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기도 했다.

 "그는 훌륭한 리더였으며, 우리 모두를 염려해줬다. 파병 당시 약 187파운드(약 85㎏)였던 그의 몸무게는 1년 후 부대원에 대한 근심과 스트레스 때문에 147파운드(약 67㎏)로 줄었으며 갈색이던 머리도 백발이 됐다."

 프랭크 댈리 중령은 자신에게 맡겨진 부대원 600명의 책임자로서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으며 600명 전원이 가족과 친구가 있는 고향으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었다. 유타주 주민들은 이를 두고 '가평의 기적' 또는 '가평의 전설'이라고 부르며 해마다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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