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저에겐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조지아의 붉은 언덕 위에 노예였던 부모의 자식과 그 노예의 주인이었던 부모의 자식들이 형제애의 식탁에 함께 둘러앉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지난 19일은 미국의 국경일 마틴 루터 킹 데이였다. 20세기 가장 존경받는 흑인 인권운동가인 킹 목사는 1963년 워싱턴 대행진에서 화해와 평화의 메시지로 유명한 ‘I have a dream’이라는 연설을 했다.
원광대 정치학과 이재봉(60) 교수를 뉴저지의 한 호텔에서 인터뷰하면서 문득 킹 목사의 감동적인 연설이 떠올랐다. 이재봉교수는 6·15공동선언실천 미주위원회 주최로 24일 뉴욕을 시작으로 25일 워싱턴DC 28일 UCLA 29일 LA에서 순회 강연을 갖고 있다.
이재봉 교수가 최근 일반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사건이 있었다. 지난해 12월 10일 익산성당에서 열린 ‘재미동포아줌마’ 신은미씨 강연장에서 한 고교생이 던진 폭발물 투척사건 당시 앞자리에 있던 그는 폭발물 파편을 머리와 왼팔 무릎 등에 뒤집어 쓰는 바람에 입원 치료를 받았다.
신은미씨의 익산 강연회를 주선한 것이 바로 이재봉 교수였다. 그녀가 강연회 초기 일부 종편방송의 선동적 보도로 ‘종북아줌마’로 매도되고 하지도 않은 ‘북한 지상낙원’ 발언으로 ‘종북콘서트’로 마녀사냥 당했을 때 마음의 상처를 입은 신은미씨는 미국으로 돌아가려 했다.
폭발물 투척은 강연이 한시간 정도 경과했을 때 일어났다. 괴청년이 냄비에 담은 폭발물을 던지는 순간 진행요원 곽모 씨가 팔로 막은 덕분에 무대 앞에 떨어졌으나 가장 앞줄에 앉았던 이교수가 피해를 입게 된 것이었다.
벌써 한달반이 경과했지만 이재봉 교수는 여전히 왼손목에 붕대를 감고 치료중이었다. 그는 “제가 워낙 둔해요. 다치고도 그냥 집에 가려했는데 주위에서 상처가 심각하니 병원에 가야한다고 해서 입원치료를 받았어요”하고 말했다.
정작 그가 병상에서 놀랐던 것은 문제의 테러범이 고교 3년생 오모(18) 군이라는 사실이었다. “성당 앞에서 데모하던 어르신이 했다면 그러려니 했겠지만 대체 무엇 때문에 고교생이 이런 끔찍한 짓을 저질렀는지..이건 뭔가 잘못됐구나.. 교육자의 한사람으로서 가만 있을 수 없었어요.”
며칠후 경찰서 유치장을 찾아가 오군을 만나 보았다. 그는 오군을 ‘칭찬’부터 했다.
오군이 북한에 대해 반감을 갖게 된 것은 초등학교때 한 교회에서 선교사로부터 북한 얘기를 들은 것이 계기였고, 종편방송을 통해 신은미씨가 북한을 지상낙원이라고 했다고 믿어 분노한 것을 알게 되었다.
이재봉 교수는 연초 공개편지를 통해 “교회에서 사랑 대신 증오심을 키운 것도, 우리 언론의 종북광풍에 휘둘려 이런 행동을 한 것도 안타까웠다. 우리 사회구조의 잘못이니 이 학생도 피해자다. 용서해주자”고 제안했다.
이교수는 오군에게 “우리 모두 사회를 바꿔보고 싶다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지만 자네는 테러를, 나는 비폭력을 통해 바꾸려는 차이가 있네. 자네가 죽이고 싶을만큼 증오했다는 신은미씨가 어떤 글을 썼는지 한번 보고 무엇이 옳은 일인지 생각해보게”하고 일러주었다.
그가 오군을 용서하겠다고 말한 이후 지지와 반대의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반대 이유로는 ‘테러를 용인하는 사회분위기가 되선 안된다. 모방범죄가 나올 수 있다’는 의견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교수는 “테러의 유일한 피해자도 아닌 저 혼자서 용서한다는 것은 어폐가 있다. 그러나 처벌보다 용서의 힘으로 오군을 비폭력운동가의 길로 인도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얼마전 그는 신은미씨의 수양오빠가 되었다. “신은미씨는 온 사회로부터 마치 마녀라도 된듯이 평가를 받았어요. 한국 나온 계기가 조카 결혼식때문이었는데 이 사건 터지면서 결혼식 참석도 못하고 심지어 어머니한테도 당분간 끊고 살자는 얘기가 나왔습니다. 우리 사회가 얼마나 모질게 했으면 가족의 인연을 끊을 정도가 됩니까? 우리나라 모두가 신은미씨를 팽개치면 나라도 가족이 되겠다고 했습니다. 신은미씨가 그때부터 오라버니로 부르고 있어요.”
그에겐 작은 소망이 하나 생겼다. 조국서 추방된 신은미씨 오빠가 되고 감옥에 갇힌 테러범 소년의 선생이 되어 셋이서 한자리에 만나는 것이다.
“신은미씨가 북한에서 수양딸이 생겼듯이 자신을 증오했던 소년을 수양아들로 삼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저에겐 아름다운 꿈이 있습니다. 조국서 추방당한 신은미씨가 앞으로 5년간 입국을 못하는데 최대한 빨리 입국금지가 풀려서 수양딸이 있는 평양에 갔다가 서울에 들어올 때 그 소년과 함께 공항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낭만적인 꿈이 아니라 현실로 이뤄질수 있는 꿈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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