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숙은 삶의 의미를 잃고 영혼이 말라가는 중구를 위해 젊고 아름다운 여인 ‘민경’을 모델로 소개한다. 정숙이 아무리 노력해도 할 수 없던 것을 민경은 해낸다. 중구는 생의 찬란함을 다시 느껴간다. 건강도 점차 회복하는 듯하다. 정숙은 중구의 작업실을 끝내 찾지 않는다. 찾을 수 없다.
배우 김서형(41)은 정숙을 “내가 연기했던 역할 중 가장 강한 인물”이라고 했다. 김서형은 속된 말로 센 역할을 자주 맡았다. 큰 키에 차갑고 이지적으로 보이는 외모 탓이다. 대중이 막장 드라마의 원조로 불리는 '아내의 유혹'의 ‘신애리’로 김서형을 기억하는 건 이 때문이다.
하지만 정숙은 김서형이 주로 연기한 전문직 여성이나 복수에 불타는 여자와는 거리가 멀다. 정숙은 단아하고, 조신한, 남편만을 바라보는 여자이지 않은가.
김서형은 시나리오를 쓴 조근현 감독에게 자신을 설득시켜 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조 감독에게 돌아온 대답은 단호했다. “정숙은 그런 여자다. 받아들여라.” 어떻게든 연기해내야 했던 김서형은 촬영장 주변을 홀로 걷고 또 걸었다.
‘봄’의 배경은 베트남 전쟁 직후다. 시대적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전라남도 벌교 등지에서 촬영했다. 아직 도시의 때가 묻지 않은 장소들이다. 김서형은 촬영이 없는 날에도 이곳을 떠나지 않고 논두렁을 따라 풀밭 사이를 걸으며 정숙에게로 들어가려고 했다.
슬프지만 슬퍼할 수 없고, 외롭지만 외로워해서는 안 되는 인물이 정숙이다. 김서형은 “정숙을 그렇게 받아들이니 보이기 시작했다”고 했다. “겉으로 드러난 힘보다 내면의 견고함을 보기 시작하니 정숙은 누구보다 강한 인물이었다.”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시나리오를 보고 영화를 선택했을 터. 그렇다면 정숙이 어떤 캐릭터인지 김서형은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선택권이 있었다. 하지 않아도 상관 없다. 그런데 김서형은 결국 했다.
“‘연기 변신을 해야겠다’라는 건 아니었어요. 배우가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하는 건 당연하니까요. 그런데 저한테는 다양한 시나리오가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아요.(웃음) ‘봄’은 기회였죠.”
‘봄’은 수묵화 같은 영화다. 이 영화에서 꾸며지고 과장된 설정 같은 건 좀처럼 찾기 힘들다. 시종일관 잔잔하고 여백이 느껴진다. 김서형은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영화였다”고 말했다.
“이런 영화를 하는 게 정말 재밌어요. 배우에게 길은 하나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렇게 안 되면 저렇게 하면 되는 거죠. 작은 영화, 단편영화가 제게는 또 다른 길이었어요.”
김서형은 ‘봄’으로 마드리드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자신의 그런 노력을 보상받은 느낌이었을까.
“감사할 뿐이죠. 그런 마음은 없어요. 저는 단지 계속 연기해 나갈 뿐입니다.” 그는 15년이 넘는 시간을 쉬지 않고 연기했다. “연기를 한, 두 달만 안 해도 빨리 다른 작품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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