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정리 봉사 모범운전자들의 '수난시대'…지시무시, 욕설도 다반사

기사등록 2014/11/11 09:50:29 최종수정 2016/12/28 13:38:57
【서울=뉴시스】박성환 기자 = "아들뻘 되는 운전자에게 입에 담기조차 힘든 욕설을 들으면 하루 종일 생각나서 일도 손에 안 잡혀요."

 지난 10일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새벽. 찬바람이 불고 제법 쌀쌀했지만 서울 동작구 사당역 교차로 캄캄한 고가 밑에 모범운전자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26년째 교통 봉사 활동 중인 전국모범운전자연합회 서울지부 윤석범(55) 회장은 담배와 커피 한 모금으로 추위를 달래더니 이내 모범운전자 마크가 선명하게 새겨진 모자를 푹 눌러쓰고, 형광색 두꺼운 외투 옷깃을 단단히 여민 채 익숙한 듯 발걸음을 옮겼다.

 상습 정체구간으로 서울에서 교통체증이 가장 심각한 곳으로 손꼽히는 사당역 교차로. 그는 도로 한복판에서 빨간색 지시봉을 들고, 연신 호루라기를 불며 교통정리를 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출근시간이 가까워지자 누군가 신호를 무시하고 교차로에 진입하면서 차량들이 서로 엉켜 오도 가도 못한 채 하릴없이 경적만 울려 됐다.

 출·퇴근시간 사당역 교차로의 고약한 교통체증을 손바닥 보듯 꿰고 있는 그에게는 그저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다. 그의 호루라기 소리가 거칠게 연달아 들리더니 엉킨 실타래가 풀린 듯 다시금 차량 소통이 원활해졌다.

 제법 쌀쌀한 날씨에도 그의 이마에는 어느덧 굵은 땀방울이 맺혔다. 그렇게 차량 소통이 원활해져 한 숨 돌리나 싶더니 신호를 위반한 차량이 눈에 띄었다. 그의  정지 신호를 무시한 채 무리하게 교차로에 진입한 차량이었다.

 해당 운전자는 창문을 내리더니 윤 회장에게 다짜고짜 "이 ○○○야, 네가 뭔데 가는 길을 막느냐", "바빠 죽겠는데 회사 늦으면 책임 질꺼냐" 등 욕설을 퍼부었다.

 윤 회장이 "신호를 위반하고 교차로에 진입하면 사고가 날 수 있다"고 설명했지만 더 심한 욕설을 쏟아내며 협박까지 서슴지 않았다. 윤 회장은 시간이 더 길어지면 가뜩이나 복잡한 교차로가 더 혼잡해질 것을 우려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윤 회장은 "모범운전자이자 교통 봉사자라는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추위와 싸우고, 매연을 마셔가며 도로 한복판에서 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며 "수신호를 무시하거나 따르지 않는 경우가 많고, 욕설과 심한 모욕적인 말을 하는 운전자들도 적지 않아 속상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고 토로했다.

 아들뻘되는 몰지각한 운전자들로부터 심심찮게 욕설을 듣고도 넘겨야하는 모범운전자들이지만 교통봉사는 아무나 할 수 있는게 아니다. 

 교통 봉사를 하는 모범운전자들은 영업용 차량 10년 이상 무사고나 경찰서장의 포상을 수상한 운전자 중 교통안전 봉사 활동 희망자에 대해 엄격한 심사를 거쳐 경찰서별로 선발한다.  

 이들은 출퇴근길 교통 봉사 활동은 물론 각종 축제나 행사에 동원돼 교통경찰의 부족한 일손을 돕는 역할을 한다. 경찰 보조자로 법적인 지위를 인정받으며 교통 봉사 활동 중인 전국의 모범운전자는 3만 명이 넘는다. 

 모범운전자들은 도로 위에서 수난을 당하기 일쑤다. 이들의 수신호를 무시하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욕설과 협박, 폭행까지 일삼는 운전자들이 적지 않다. 심지어 수신호를 무시한 채 내달리던 차량에 부딪혀 중상을 입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모범운전자도 있다.  

 현행 도로교통법에는 운전자들이 교통정리중인 모범운전자의 지시를 따르도록 규정돼 있다. 이를 어길 경우 ▲이륜차 운전자 4만원 ▲승용차 운전자 6만원 ▲승합차 운전자 7만원·벌점 15점이 부과된다. 범칙금은 모범운전자가 위반 차량의 사진을 찍어 신고하거나 현장에 함께 있던 경찰관에 의해서 부과된다. 

 하지만 이를 아는 운전자가 거의 없을뿐더러 실제 범칙금을 부과하는 경우도 흔치 않다. 모범운전자들이 범칙금고지서를 발급하도록하는 것 보다 사실상 순수 봉사활동에 촛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경찰 역시 모범운전자들의 지시를 무시하는 위반 차량들에 대해 적극적인 단속을 실시하지 않는 등 제대로 된 지원을 하지않는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모범운전자들은 운전자들에게 심한 욕설이나 막말을 들을 때 가장 고통스럽다고 토로했다.

 37년째 봉사 활동을 하고 있는 모범운전자 박인석(60)씨는 "우리는 언제든지 사고가 날 수 있는 위험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며 "운전자들이 지시에 잘 따르지 않거나 심한 욕설이나 막말을 할 때는 우울하고 자괴감에 빠지기도 한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도로 한복판에서 운전자들에게 심한 욕설을 듣는 게 일상이 되어버린 모범운전자들은 오늘도 위험을 무릅쓰고 출·퇴근시간 혼잡한 교차로에서 연신 호루라기를 불고 있다. 

 sky0322@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