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119주기⑤끝]'명성황후 산채로 불태워' 美 LA헤럴드 1895년 충격보도

기사등록 2014/10/11 21:57:47 최종수정 2016/12/28 13:29:51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로스앤젤레스 헤럴드는 1895년 11월18일 ‘조선의 시해된 왕비(Corea's Murdered Queen)’라는 기사에서 “일본 낭인들이 여왕의 침소에 들어왔을 때 4명의 여인이 있었다. 왕비의 얼굴을 몰랐기 때문에 4명 모두 살해했다. 이불에 싸인채 뒷마당으로 옮겨져 석유를 흠뻑 뿌린후 불에 태웠다. 왕비는 살아있는 상태에서 불태워졌다”고 충격적인 사실을 보도했다. 2014.10.10. <사진=미의회도서관 DB> robin@newsis.com
목격자 미국인 장군 존재 첫 언급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명성황후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가장 광범위하게 알려진 것은 일본 낭인배들이 휘두른 칼에 난자돼 시신을 불태웠다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사체능욕설, 국부검사 등 '필설로 다하기 어려운 잔인한 행위'를 했다는 주장도 있다.

 황후의 시신을 불태운 것은 증거를 남기지 말라는 미우라 고로(三浦梧楼) 당시 일본 공사의 지시에 따른 것이다. 미우라 고로는 을미시해의 주범이었다. 시해 주동 혐의로 투옥되었으나 이듬해 군법회의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1923년 79세의 천수를 누리고 사망했다.

 미우라 등의 음모에 따라 일본이 조선의 국모를 살해하고 증거를 없애기 위해 석유를 뿌려 불태웠다는 내용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미국의 한 언론이 명성황후 시해에 대해 그간 알려지지 않은 충격 보도를 한 사실이 처음 밝혀졌다.

 로스앤젤레스 헤럴드는 1895년 11월18일 '조선의 시해된 왕비(Corea's Murdered Queen)'라는 기사를 실었다. 전날 위스콘신의 밀워키 센티널 보도를 인용한 이 보도는 조선의 왕비에 대한 놀랄만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

 "일본인들이 조선을 격분시키고 있다. 일본 낭인배들이 왕비를 살해했으며, 배후에서 일본의 군대가 도왔다. 그들이 여왕의 침소에 들어왔을 때 4명의 여인이 있었다. 그들은 왕비의 얼굴을 몰랐기 때문에 4명 모두 살해했다. 칼로 도륙된 시신들은 이불에 싸인채 뒷마당으로 옮겨져 석유를 흠뻑 뿌린후 불에 태웠다. 왕비는 살아있는 상태에서 불태워졌다.(The Queen was cremated alive)"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1904년 10월21일 네브라스카 애드버타이저는 삽화를 곁들여 고종이 명성황후의 무덤에 일년에 두 번씩 병사들을 이끌고 행차했다면서 “이 길은 폭이 50피트나 되며 극동에서 가장 좋은 도로”라고 소개했다. 사진 오른은 1920년 8월2일 노스플랫 세미위클리 트리뷴에 실린 명성황후 무덤의 장군석. 2014.10.10. <사진=미의회도서관 DB> robin@newsis.com
 이는 지금까지 정설로 알려진 '살해후 시신 소각'을 전면 부인하는 것이다. 또한 조선의 고문관 다치스카 에이조(立塚英藏)가 남겼다는 이른바 '에이조 보고서'에는 미국인 목격자 내용이 나온다.

 '왕비를 끌어내 두세 군데 칼로 상처를 입히고 옷을 벗겨 국부 검사를 하고, 기름을 뿌려 소실했다. 불행하게도 어떤 미국인이 현장을 목격하고 있었다하니 일방적으로 말살해버릴 수 없다.'  

 로스앤젤레스 헤럴드는 "조선을 위해 싸운 미국의 한 장군이 있었다. 그는 이번 소요의 목격자로 그는 일본이 궁궐을 난입할 때 수비대를 지휘했고 영웅적 저항을 했다. 그는 몇 방의 총탄을 맞는 등 거의 생명을 잃을 뻔 했다. 만일 그가 생명을 잃었다면 일본정부는 미국과 아주 심각한 문제에 직면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안타깝게도 로스앤젤레스 헤럴드는 이 미국인의 이름을 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 낭인배들이 조선의 꼭두각시 군인들을 앞세워 쳐들어왔을 때 이에 맞서 싸운 미국 군인이 있었다고 언급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헤럴드의 언급대로 만일 이 미국인이 죽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미국정부는 소극적인 관망에서 벗어나 조선 문제에 본격 개입, 조선과 동북아의 역사는 또한번 드라마틱하게 바뀌었을 것이다.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1904년 4월18일 뉴욕 트리뷴은 5면 톱기사로 명성황후의 ‘손가락 무덤(Tomb of Finger)’을 취재해 눈길을 끌었다. 이 기사는 전날 명성황후가 거처하던 건청궁이 철거됐다는 소식과 함께 베일에 가려 있던 유해처리 과정도 전하고 있다. 2014.10.10. <사진=미의회도서관 DB>  robin@newsis.com
 ◆ 명성황후의 '손가락 무덤'

 명성황후의 무덤은 경기도 남양주 홍릉이다. 본래는 청량리 홍릉에 있었으나 1919년 고종 승하후 현재의 능으로 합장 이전됐다. 일본이 증거를 말살하기위해 낭인배가 불태워 한 줌 재로 만들었다는 황후의 유해가 어떻게 남아 있었던걸까.

 1904년 4월18일 뉴욕 트리뷴은 5면 톱기사로 명성황후의 무덤을 현장 취재해 눈길을 끌었다. '손가락 무덤(Tomb of the Finger)'이라는 부제가 달린 기사는 전날 명성황후가 거처하던 건청궁이 철거됐다는 소식과 함께 베일에 가려 있던 유해처리 과정도 전하고 있다.

 "조선왕비가 거처하던 궁의 철거는 은둔의 왕국 통치자를 특별한 상황으로 남겨두었다. 서울엔 3개의 궁이 있다. 왕은 암살될지도 모른다는 미신적인 공포로 인해 불을 지르고 파괴했다. 첫 번째 궁은 몇 년전 왕이 아끼는 사람이 죽은 후 없앴고 두 번째 궁은 왕비가 죽으면서 없앤 것이다, 이제 하나 남은 궁에 돌아가지 않는다면 그는 집이 없는 것이다. 왕비가 살해된 서울의 북쪽에 있는 궁엔 죽음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졌다.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난지 10년이 되었다. 정신적으로 강했던 왕비는 왕을 조종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뉴욕 트리뷴은 건청궁에 있던 일본인 소녀의 존재도 처음 언급했다. "궁에서 일하던 일본 소녀가 눈에 띄지 않는 미로로 일본 낭인배들을 궁에서 바깥쪽으로 안내했다. 어둠에 싸여있을 때 불에 태웠고 남은 왕비의 손가락뼈만 몇마일 떨어진 곳에 옮겨져 묻어졌다."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1904년 10월21일 네브라스카 애드버타이저는 삽화를 곁들여 고종이 명성황후의 무덤에 일년에 두 번씩 병사들을 이끌고 행차했다면서 “이 길은 폭이 50피트나 되며 극동에서 가장 좋은 도로”라고 소개했다. 2014.10.10. <사진=미의회도서관 DB> robin@newsis.com
 황후의 시신은 건청궁 바로 바깥에 있는 녹산에서 소각돼 유해를 향원정에 뿌린 것으로 알려졌다. 시해 며칠 후 문틈에서 황후의 새끼 손가락이 발견됐다는 사실도 전해진다. 고종에게 전달돼 무덤으로 만들어진 유해는 바로 명성황후의 손가락 뼈였다.

 뉴욕 트리뷴은 "왕비의 얼마 안되는 유해가 묻힌 능 앞에는 석탑이 세워졌다. 이곳은 조선인 병사가 지키고 있어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었다. (기자가) 유니버설 여권을 제시하고 설득하여 옆의 쪽문을 통해 들어갈 수 있었다. 20에이커 크기의 마당은 나무로 울창했고 다양한 석탑들이 있다."  

 1897년 대한제국 황제로 등극한 고종은 청량리에 있는 명성황후의 무덤을 자주 찾았다. 열여섯살에 한 살 어린 신부를 만나 근 30년의 파란만장한 세월을 함께 했다. 고종은 비명속에 스러진 황후를 애틋하게 생각했던 모양이다. 홍릉으로 가는 길을 그 어느곳보다 훌륭하게 닦았고, 일본의 노골적인 압력에도 일년에 두 번씩 대규모 행차를 했다.

 홍릉 도로를 '한국에서 가장 좋은 길'이라고 보도한 미국의 언론이 있었다. 1904년 10월21일 네브라스카 애드버타이저였다. 신문은 삽화를 곁들여 다음과 같이 전했다.

 "한국의 도로는 별로 상태가 안좋고 말이나 마차가 다닐만 하지만 유일한 예외가 있다. 극동에서 가장 좋은 둑길(Cause way)로 불리는 곳이다. 이 길은 서울(궁)에서 약 15마일(24km) 떨어진 피살된 왕비의 무덤으로 가는 길이다. 폭이 50피트(약 15m) 되는 이 도로를 이용해 황제는 일년에 두번 4000~5000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행차한다. 6개월마다 이뤄지는 왕의 행차는 일본의 강력한 반대를 받고 있다. 왕비는 도쿄에 있는 대신의 선동으로 일본 군인들이 살해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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