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호에게 임시정부의 문지기라도 시켜달라고 했던 인사청탁의 장본인 김구는 한때 우(右)에서는 김일성 등 빨갱이와 내통했다며 좌로 몰리고, 좌(左)에서는 극우로 몰리는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적어도 김일성 등과 내통했다는 누명은 벗어도 좋을 것 같다. 김구가 공산주의와 내통한 흔적은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중도파로서 좌와 우의 통합을 위해 한평생을 바쳤다는 찬사도 걷어 들여야 할 것 같다. 김구 지지자들에게 가장 아픈 부분은 이 점이 될 것 같다.”
‘김구 청문회’라는 두 권짜리 책이 나왔다. 1권은 ‘독립운동가 김구의 정직한 이력서’, 2권은 ‘김구는 통일의 화신인가?’라는 부제를 달았다. 백범(白凡) 김구(1876~1949)를 “친일파가 만든 독립영웅”이라고 비판한다. 그 유명한 ‘백범일지’부터 문제 삼는다. 백범이 쓴 게 아니라 춘원(春園) 이광수(1892~1950)가 윤문, 각색했다는 것이다.
“일지(逸志)는 ‘훌륭하고 높은 지조를 쓴 기록물’이란 뜻이다. 김구는 자신의 얼굴에 스스로 금칠을 한 셈이다. ‘국사본 백범일지’는 처음부터 유려한 문장, 쉽고 간결한 문체로 출발했다. ‘친필본 백범일지’와는 차이가 너무 많은 작품이다. 백범의 조상 이야기를 소개한 도입 부분부터 다르다. 친필본은 ‘조선(祖先)은 안동 김성(金性)이니 김자점씨의 방계라’로 시작된다. 국사본의 첫 부분은 ‘우리는 안동 김씨 경순왕의 자손이다’로 출발한다. 국사본은 재구성본이라고 해야 맞을 정도다.”
“김구의 주장에 의하면 그는 나이 열아홉에 동학의 정식 접주가 됐고, 곧 고향으로 돌아와 ‘팔봉’이란 접명(接名)을 지었다고 한다. ‘천도교 창건사’ 등 동학이나 시천교, 천도교 등의 자료 어디에도 19살 접주 김창수(개명 전 이름)는 등장하지 않는다.”
“1896년 3월9일 치하포에서 쓰치다 조스케를 죽인 사건은 김구의 업적을 꼽을 때 언제나 첫 머리로 등장한다. ‘국모보수(國母報讐)’다. 그런데 김구는 일제에게 신문을 당하는 과정에서 쓰치다를 ‘일본사람’ ‘일본인’이라고 표현했다. ‘백범일지’가 쓰치다의 정체를 ‘일본 육군중위’라고 한 것은 분명히 작의적인 왜곡이다.”
“백범의 종교편력은 유명한 이야기다. 무속, 유교, 풍수·관상학, 동학, 불교, 기독교, 그리고 사후에는 가톨릭 성세를 받아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유교를 입신의 수단으로 삼았으나 과거 낙방으로 좌절했다. 그 후 풍수와 관상 등 무속 관련 학문에도 잠깐 흥미를 보이기도 했으나 곧 동학에 입도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동학도가 된 것도 기인이사, 이적 등 미신적인 요소에 대한 호기심이 큰 동기였다. 불교에 입적해 ‘원종(圓宗)’이란 법명을 얻은 것은 탈옥 후 신분세탁의 의미가 큰 개종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는 너무 쉽게 믿고 너무 쉽게 그 종교를 버렸다. 백범에게 종교는 목적이 아니고 수단이었다.”
“김구의 노선은 갈짓자 행보였다. 그의 노선은 반소·반공, 반탁·임정봉대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임정 정통론이다. 이 목적을 위해서라면 정적 제거작업을 망설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정적과의 제휴 역시 기피하지 않았다. 1947년 11월 말부터 12월 초, 짧은 기간이지만 그 무렵 김구의 노선은 분명히 남한 단정론의 인정이었다. 자신의 생각이 이승만의 주장과 조금도 다름이 없으니 남조선 총선거로 정부를 세워야한다고 말했다.”
“김구의 아들 김신이 박정희의 쿠데타에 일조함으로서 얻게 된 과실은 엄청났다. 김신의 일신영달과 가족들의 기득권 진입은 차치하고라도 아버지 김구는 진보·보수·여야의 경계와 상관없이 대다수 국민이 숭배하는 민족의 영웅으로 자리잡게 됐다. 이러한 결과에는 민족의 영웅으로 김구를 선택한 박정희의 공로가 크다.”
김구는 친일파는 아니다. “그러나 그는 친일파 부일배들로 이뤄진 한민당으로부터 수많은 자금을 받았고 그들과 결탁했다. 부일협력 재벌 최창학으로부터 제공받은 김구의 거주지 경교장(죽첨장), 송진우로부터의 900만원, 김연수에게 700만원 등은 극히 일부의 예이다. 더욱이 1962년 김구에게 수여된 건국공로훈장 중장(현 대한민국장·건국훈장 1등급)은 친일전력이 있는 박정희 군사정권 하에서 이병도, 신석호 등 친일 사학자들이 심사해 결정한 것이다. 이승만이 숨겨진 친일파라면, 김구의 경우 친일파들이 그를 항일독립 통일의 영웅으로 만들었다는 뜻이다.”
“3·1 운동, 각종 독립운동 및 독립선언서에 왜 ‘김구’라는 이름이 없었는지 의아했다”는 저자 김상구(58)는 뜻밖에도 ‘수구꼴통’이 아니다. 지난 3월 펴낸 책 ‘다시 분노하라’에서는 이승만을 친일파로 규정했다. “이승만은 독립운동 분열의 원흉이다. 이승만의 박사학위는 만들어진 것이다. 이승만과 김노디 사이에 사생아가 있었다는 증언이 있다. 이승만은 본처 박승선의 호적을 파냈다. 이승만의 재산은 프란체스카의 숨겨진 아들에게 전해졌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승만의 독재 성향은 하와이 망명시절부터 시작됐다”고 강변한 ‘좌빨’이기도 하다.
문화부장 reap@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