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단의 극찬과 함께 2014 골든글로브 최우수 애니메이션상, 애니상 최다부문 수상, 아카데미 최우수 장편 애니메이션상과 주제가상에 노미네이트되는 등 작품성 또한 인정받았다. OST는 ‘빌보드 200’ 차트 1위에 올랐고 여주인공 엘사의 테마곡인 ‘렛 잇 고’는 국경을 초월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
‘겨울왕국’의 모티브가 된 안데르센의 동화 ‘눈의 여왕’은 월트 디즈니(1901~1966) 생전부터 디즈니의 숙원사업이었다. 유명제작자 새뮤얼 골드윈과 손잡고 안데르센의 전기를 만들며 그의 작품 부분은 디즈니가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기로 했으나 엎어졌고, 이 중 ‘눈의 여왕’ 캐릭터는 결국 갈피를 못 잡다가 무기한 연기됐다. 1990년대 다시 시작된 프로젝트는 2002년 말 또다시 폐기됐다. 디즈니의 오랜 꿈인 ‘겨울왕국’이 명성회복의 신호탄이 되자 2000년대 들어 별다른 히트작을 내지 못하며 애니메이션 명가로서의 자존심을 구기고 있던 디즈니는 잔칫집 분위기다.
여기저기서 ‘대박’ 요인을 분석 중이다. 브로드웨이급 뮤지컬, 첨단 CG기술로 만들어낸 환상적인 3D 비주얼, 비극적이며 파괴적 캐릭터, 낭만적이며 모험적인 캐릭터, 귀여우면서도 친근한 캐릭터 등 갖은 캐릭터의 조화, 디즈니의 공들인 공정, 21세기형 진취적 여주인공과 자매애, 가족애라는 주제를 꼽기도 한다. 1989년부터 10년간 지속됐던 ‘디즈니 르네상스’의 부활이라는 말도 나온다. ‘인어공주’(1989), ‘미녀와 야수’(1991), ‘알라딘’(1992), ‘라이언 킹’(1994), ‘포카혼타스’(1995) 등 줄줄이 히트작을 낸 시기의 디즈니 작품 고유의 특성을 다시금 불러내며 정체성을 회복하게 됐다는 분석도 있다. 복고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 것이 성공요인이라는 것이다.
이러저러한 가시적 요소들이 ‘겨울왕국’의 흥행요소로 지목되고 있지만 작품을 만들면서 전력을 다하지 않는 경우는 없다. 이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낸 제작진의 면면을 따져보자면, 여성인력의 활용과 2006년 인수한 신생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픽사의 영향이 완성도와 예술성을 높이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보여진다.
‘겨울왕국’의 가장 독특한 점이라면 전에 없던 여성 캐릭터 ‘엘사’의 활약이다. 여성들이 가슴깊이 공감할 만한 섬세한 여성캐릭터를 만들어내는 데는 월트디즈니애니메이션스튜디오 최초의 여성 극장개봉 장편 감독 제니퍼 리(43)의 참여와 픽사 출신 존 라세터(57) 크리에이티브 총괄대표(CCO)의 힘이 컸다.
크리스 벅(54)과 공동연출을 맡고 각본을 쓴 제니퍼 리는 메이저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서 작가출신으로 감독이 된 첫 번째 케이스이기도 하다. 영문학을 전공하고 출판사에서 그래픽 아티스트로 일하던 그녀는 스무살 때 애인이 죽은 후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열망을 품게 됐다고 한다. 뒤늦게 뉴욕 컬럼비아대학원에 진학해 영화학 석사를 따게 되는데, 글쓰기 수업을 듣다가 만난 필 존스턴과 후에 오스카상에 노미네이트된 ‘주먹왕 랄프’(2012)의 공동각본가로 일하게 된다. ‘LA위클리’는 영화업계에서 여성감독은 4%뿐이고, 그녀는 심지어 마흔이 넘어 성공한 케이스라며 ‘디즈니의 새 애니메이션 여왕’이라 추어올리기도 했다.
극중 아렌델 왕국의 여왕이 되는 엘사는 제니퍼 리의 손에서 보다 예리하고 독특한 캐릭터로 피어난다. 공공연히 밝히지는 않았지만 재능있고 감수성 높은 예술가 타입의 여성 캐릭터는 스스로의 모습을 반영했을 가능성이 높다. 보다 깊이 있는 감정묘사로 젊은 여성들의 공감대를 한껏 높였다. 국내에서도 애니메이션은 아이들이나 보는 것이라는 선입견을 깨고 20, 30대 여성관객들의 관람이 눈에 띄게 늘어난 이유다.
남성들과 달리 남다른 능력을 가진 여성의 경우, 과거 마녀로 몰리고 ‘겨울왕국’에서는 ‘괴물’로 불리듯이 위험하게 여겨지는 수가 많다. 자신의 능력을 숨기고 조신한 외양을 갖춰야한다는 무의식적 압력에 의해 유폐되고, 결국은 “아무도 상처주지 않아도 된다”며 자신이 지은 얼음궁전에 스스로를 가둬버린다.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괴로움에 자기자신을 방어하고 강해지려 할수록 모든 것을 얼려버리는 엘사의 괴력은 뾰족하고 공격적인 고드름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심리적 고통의 시각화가 남자 못지않은 실력발휘를 하면서도 잠재적 두려움에 시달리는 현대여성들이 감정이입 되도록 한다.
엘사는 여느 디즈니 여주인공 못지않게 ‘쭉쭉빵빵’한 몸매를 지닌 섹시한 미녀지만, 이를 자신을 구원해줄 남자를 매혹시키거나 눈요기로 이용하지 않는다. 남자 상대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독립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여동생 안나에게 “막 만난 남자와는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성적인 조언도 그녀의 입에서 나온다. 주체적 여성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골드미스’를 비롯한 직장여성들이 공감할 여지가 크다.
원작에서는 악녀였던 ‘눈의 여왕’은 이렇게 복합적이고 당당한 캐릭터로 변모, 예민한 성정으로 질풍노도의 시기를 힘들게 보내지만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결국 여왕이 된다. 엘사와 안나를 치유하고 구원하는 것은 ‘자매애’인데 이 또한 21세기를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와닿는 덕목이다.
한편 애니메이션계에 기술혁명을 몰고 온 픽사는 디즈니에 영입된 후에도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는 반면, 오히려 디즈니가 픽사의 영향으로 새 활로를 연 케이스라고도 하겠다. ‘겨울왕국’에 앞서 미키마우스가 주인공인 단편 ‘말을 잡아라!’를 선보이는데, 이는 픽사가 장편 상영에 앞서 새로운 CG 제작기법을 활용한 단편들을 선보여온 관례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 중심에 있는 인물이 애니메이션계에 새 바람을 몰고 오며 아카데미 특별공로상까지 받은 첫 장편 CG 애니메이션 ‘토이스토리’(1995)의 감독 존 라세터다. 현재는 디즈니와 픽사의 공동 CCO를 맡아 양사의 부흥을 쌍끌이하고 있다. 월트디즈니사의 디자인과 개발을 맡고 있는 월트디즈니이매지니링의 크리에이티브 자문대표를 겸할 정도로 그의 창의성은 정평이 났다.
2008년 크리스 벅 감독은 ‘안나와 눈의 여왕’이라는 가제로 이 프로젝트를 되살리게 되는데, 2012년 존 라세터가 프로듀서로 가세하면서 박차를 가하게 된다. 그의 아이디어가 가미되면서 비로소 현대적인 스토리로 재탄생하게 됐다고 한다. ‘토이스토리’ 시리즈와 ‘벅스라이프’ 등의 시나리오를 직접 써온 그의 상상력과 구성력은 그가 프로듀싱을 맡은 양사의 작품들에 특별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토이스토리’에서 보여진 것처럼 실제 존재하는 듯 인간미 넘치는 등장인물들은 그의 특장점 중 하나인데 그가 총괄프로듀서를 맡은 픽사의 최근작 ‘몬스터 대학교’(2013)에서도 이러한 면이 잘 드러난다. 외눈알 꼬마 마이크 캐릭터는 노력에 비해 재능이 부족하다고 여겨 고뇌하며 자신의 길을 모색하는 대학생 역을 맡아 그 시기를 보낸 많은 이들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더불어 국내에서 자막판과 더빙판이 골고루 호응을 얻으며 두루 주목받고 있는 것도 특기할 만하다. 더빙버전을 제작하는 이유는 글을 잘 읽지 못하는 어린아이들을 배려하는 의도가 큰데, 이의 완성도를 높이면서 10대 이상 관객들 사이에 자막버전과 더빙버전 모두를 관람하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도 한 몫했다. 인터넷에서는 ‘겨울왕국’이 개봉한 각국의 더빙판을 비교해보는 포스트도 눈길을 끈다. 아렌델 왕국의 실제 배경이 된 노르웨이는 고 퀄리티의 재녹음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미국 디즈니 본사는 더빙판의 가수까지 일일이 검토해 ‘품질관리’를 했다는 후문이다. 한국어 녹음에서는 대사를 처리하는 성우와 노래를 부르는 가수를 따로 캐스팅하는 2인1역 방식을 쓰기도 했다. 주인공 엘사의 목소리는 성우 소연, 노래 부분은 뮤지컬 배우 박혜나(32)가 맡았다. 엘사의 심경을 그대로 표현한 ‘렛 잇 고’를 부른 박혜나의 목소리에 디즈니 본사 측은 “영어 버전의 이디나 멘젤과 목소리가 흡사할 정도로 완벽했다”며 만족감을 표했다고 한다.
원판에서 크리스틴 벨(34)이 맡은 안나 역은 성우 박지윤이 맡아 노래까지 소화했다. 디즈니의 전작 ‘라푼젤’(2010) 한국어 녹음시 타이틀롤을 맡은 인연이 있다. ‘겨울왕국’의 이례적 성황에 걸그룹 ‘씨스타’ 멤버 효린(23)이 엔딩크레디트 송으로 부른 ‘렛 잇 고’의 디지털 음원이 발매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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