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 첫 주연작인 로맨틱 코미디 ’위험한 상견례‘(감독 김진영) 개봉을 앞두고 영화배우 이시영(31)은 그렇게 말했다. 실제로 ‘위험한 상견례’에 이어 그해 말 그 다음 주연작 역시 로맨틱 코미디 ‘커플즈’(감독 정용기)였고, 1년 여 뒤인 올해 초 들고 나온 주연작도 로맨틱 코미디 ‘남자사용설명서’(감독 이원석)였다. TV 드라마로는 KBS 2TV의 ‘포세이돈’(2011)이 있기는 했지만 액션물, 뒤를 이은 같은 방송사의 ‘난폭한 로맨스’(2012)도 로맨틱 코미디다.
올 여름, 이시영이 마침내 ‘로코 퀸’이라는 타이틀을 벗어던졌다. 호러 스릴러 ‘더 웹툰: 예고살인’을 통해서다.
‘호러 스릴러나, 로맨틱 코미디나…’라며 시큰둥해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시영이 이 작품에서 맡은 웹툰 작가 ‘지윤’은 짐작처럼 만만한 캐릭터가 아니다. 자신의 웹툰 내용과 그림 그대로 의문의 죽음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면서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는 현재의 지윤이나 후반부에 마침내 드러나는 충격적인 과거 속 지윤의 모습은 1인 다역 못잖게 출중한 연기력을 갖춘 배우여야 제대로 해낼 수 있는 그야말로 다층적이고 다변적인 캐릭터다.
이시영이 ‘더 웹툰’의 헤로인이 되기까지 우여곡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우선 시나리오 자체가 애당초 이시영에게 오지 않았다. “지난해 우연히 다른 분에게 간 시나리오를 보게 됐어요. 당시는 지윤이 웹툰 작가가 아니라 소설가였죠. 읽어보니 시나리오도 정말 재미있고, 지윤이라는 캐릭터도 아주 마음에 들었어요. 하지만 그때는 ‘나도 잘할 수 있는데 왜 나한테는 안 들어오지’라고 생각할 뿐이었죠.”
그런데 “몇달 뒤 웹툰 작가로 바뀐 시나리오를 다시 보게 됐어요. 역시 그때도 또 다른 분한테 갔죠. 시나리오가 더욱 좋아진 거에요. 그래서 매니저에게 부탁해 제작사인 라인필름 이상학 대표님을 만났어요. 이 대표님이 시나리오를 쓰셨거든요. 이 대표님은 제가 이 작품을 좋아한다고 하니 기분이 몹시 좋았나 봐요. 그날 이 대표님과 영화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죠. 그 다음부터는 새로 시나리오가 나오면 제게 직접 보내주게 됐죠. 그렇다고 제가 캐스팅된 것은 아니고요.”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와니와 준하’는 김희선(36), ‘분홍신’은 김혜수(43), ‘불꽃처럼 나비처럼’은 수애(33)가 주연했다. “그 선배님들이 어떤 분들인가요. 톱스타들이잖아요. 게다가 김 감독님이 오랜만에 연출하는 작품이니 당시의 선배님들보다 더 잘나가는 톱스타에다 연기력까지 뛰어난 분을 여주인공으로 캐스팅하지 않겠어요. 저로서는 절망할 수밖에요.”
김 감독도 이시영을 탐탁해하지는 않았다. 이시영을 두고 막판까지 고심했다. “그랬을 거에요. 제가 그 동안 정극 연기를 해본 적이 없으니 입증할 자료가 없잖아요. 그런데 저는 5월31일 제작발표회 때까지 제가 가장 먼저 캐스팅된 줄 알고 있었네요. 그날 제가 가장 늦게 캐스팅됐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얼마나 창피했는지요. 그 무슨 착각을 했던 건가요. 호호호.”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새로운 관문이 남아있었다. 출연진이 모두 모이는 대본 리딩이다. 리딩까지 함께하고도 캐스팅은 번복될 수 있다. “저는 솔직히 대본 리딩을 잘 못해요. 대사를 많이 더듬거리거든요. 그래서 아예 처음부터 권해효, 엄기준 선배님을 비롯한 여러 선배, 동료, 후배 배우들에게 솔직히 말씀드렸어요. ‘저는 리딩을 잘 못합니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누구 보다도 잘할 수 있습니다’라구요.”
진심이라는 가장 강력한 무기로 시나리오 작가이자 제작자, 감독, 그리고 함께하는 배우들의 마음까지 녹인 이시영은 자신을 믿고 기회를 준 이들을 위해 그야말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지윤의 캐릭터를 표현해나갔다. 아름다움을 넘어 숭고하기까지한 이 도전에 이상학(42) 대표, 김 감독은 물론 함께하는 엄기준(37) 등 배우들까지 모두 반해 이시영을 이끌어주고 밀어주며 하나 둘 영화를 만들어 나갔고, 이제 결실을 눈 앞에 두게 됐다.
그래도 이시영은 성에 차지 않는다. “아직도 우리 영화를 보면 제가 잘못한 것만 보여요. 최소한 웹툰이 제 부족하고 부끄러운 모습을 가려줄 거라고 기대했는데 영화를 보니 정말이지 웹툰의 도움을 많이 받았더라고요.”
자신을 채찍질하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영화의 클라이막스인 웹툰 작가 데뷔 전 지윤의 작업 공간인 지하실에서의 화재신만 봐도 그렇다. ‘더 웹툰’의 모든 비밀과 진실을 화마가 삼켜버리는 그 장면은 재개발을 앞둔 낡은 아파트의 지하실에서 실제로 불을 피워놓은 채 촬영했다. 매캐한 연기로 가득해 숨쉬기 조차 힘든 그곳에서 이시영은 가장 격한 감정 연기를 오랫동안 해야 했다. 그 신은 이시영 스스로 숨을 곳이라고 여겼던 웹툰 하나 없이 실사 그대로 스크린 위에 펼쳐졌다. 그 자리에는 ‘이시영표 지윤’이 생동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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