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 회장은 500원짜리 지폐로 톰바톰 회장을 움직여 영국 은행 차관을 약속 받았지만 배를 주문할 선주를 찾아야 했다.
그러나 정주영 회장이 가진 무기는 영국에서 빌린 26만톤급 선박의 설계도, 조선소 건립 예정지인 썰렁한 바닷가를 찍은 흑백사진 한 장이 전부였다.
어린아이라 해도 그런 계약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비웃었지만 정주영 회장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봉이 김선달이 따로 없었다. 아니 봉이 '정선달'이었다.
"다른 조선소보다 싼 값에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우리가 만든 배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돈을 돌려드리겠습니다. 우리 회사를 못 믿으신다면 우리나라에서 보증해줄 겁니다. 만약 손해배상 청구를 한다면 계약금은 물론이고 이자까지 다 물어드릴 겁니다."
정 회장은 그 어느 조선소도 제시하지 못할 파격적인 조건들을 내걸었다. 그러나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정주영 회장은 좌절감을 느꼈다.
'정말 잘할 수 있는데, 보여줄 수가 없으니 미치겠구나,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나만큼만 미친 사람이 어딘가는 있을거야.'
드디어 정주영 회장은 그토록 애타게 찾던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이번에도 롱바톰 회장이 도움을 주었다.
"리바노스라는 사람이 싼 값에 배를 구하고 있다는데 한번 만나보시겠습니까?"
"물론이지요. 어디든 당장 가겠습니다." 정주영 회장은 그리스로 날아갔다. 리바노스는 혈기왕성한 40대의 그리스 선박왕이었다. 그는 그리스에서 100년 동안 해운업을 해온 선박왕의 상속자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던 참이었다.
"당신이 정주영이란 분이군요. 소문은 익히 들었습니다." 리바노스는 업계에서 꼼꼼하기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이상하게도 황당해 보이는 정주영 회장의 프로젝트에 끌렸다. 정 회장의 설명을 다 들은 그가 웃음을 머금은 채 물었다.
"지금 내가 도박을 하고 있는 거 맞지요?"
"도박이 아니라 굉장한 투자를 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이 일을 잘해낼 것이고 리바노스 씨, 당신은 지금까지 어느 회사보다 든든하고 믿음직한 파트너를 얻게 될 테니까요."
리바노스는 호탕하게 웃고는 26만톤 급 배를 2척이나 주문했다. 계약금으로 14억원이라는 거금을 내놓았다. 당시 쌀 80㎏ 한가마니에 5000∼6000원 하던 때이니, 말 그대로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560억원에 달한다.)
"배 가격은 1척당 3095만 달러(현재 가치로 1조2000억원), 5년 반 후에는 배를 틀림없이 인도해주셔야 합니다. 단 하루도 늦어서는 안됩니다. 그럴 경우에는 손실비용을 청구하겠습니다."
물론 리바노스는 까다롭기로 유명한 영국 은행과 수출보증기구를 믿었겠지만, 그래도 이런 대단한 모험을 하는 데에는 정주영 회장에 대한 신뢰와 기대가 크게 작용했다.
조선소에서 첫 주문이 갖는 의미는 굉장히 크다. 누가 몇 톤짜리를 주문했는지가 국제 금융계에서 조선소에 대한 신용도를 좌우한다. 그리스 선박왕의 주문은 현대가 지을 조선소에 대한 신용도를 확실히 높여주었다.
'가능하다고 생각하면 안 보이던 해결책이 보이고, 불가능하다고 마음을 닫으면 있는 해결책도 숨어버리고 말아서 보이지 않는다.'
정주영 회장의 긍정적 사고가 가져다 준 선물이었다.
그때까지 한국에서 만든 가장 큰 배는 '팬코리아호'라는 화물선이 전부였다. 범양상선(현 STX팬오션)이 주문해서 만든 팬코리아호는 광물을 나르는 화물선이었는데 1만8000톤급이었다.
정 회장이 만들 배는 이보다 열다섯 배나 큰 규모이니 온 나라의 관심이 울산으로 쏠렸다. 조선소 건설현장은 전쟁터와 같았다.
현장 작업 인원은 2000명을 넘겼고 선박을 제때 인도하기 위해 작업은 24시간 멈추지 않았다.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머리가 좋고 능력이 뛰어나도 10년, 15년을 노력해서는 우리보다 100년을 앞서가는 선진국을 따라잡기란 어렵습니다. 그들을 따라잡으려면 그들이 쓰는 10시간을 20∼30시간으로 늘려서 시간 차를 극복해야 합니다."
정주영 회장은 작업장에서 거의 매일 살다시피 했다. 그는 작은 효율들이 모여서 공사 기간의 단축을 가져온다고 믿었다. 정 회장이 작업장을 찾던 어느 날 작업차 한 대가 앞길을 막아서자 운전기사가 자동차 경적을 울리며 고함을 쳤다.
"이거 회장님 차입니다. 안 보입니까?"
"어허! 자네 저거 작업차인 거 안 보이나? 어서 뒤로 차를 빼게. 우리 현장에서는 무엇보다 작업차가 최우선일세. 대통령이 와도 양보해선 안돼. 알겠나?"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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