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5일 쾌청한 날씨는 잠깐이었나, 저녁이 되자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미드나이트선 투어가 있다고 다늦게 나갔던 홍콩처자들이 밤늦은 시간 그냥 돌아왔다. 비바람이 몰아쳐서 투어가 취소됐다고 한다. 미드나이트선(백야에 떠있는 한밤의 태양)은 항상 있는 것인데 그걸 따로 돈내고 구경하는게 의미가 있느냐고 물어봤더니 바다로 배를 타고 나가 태양이 움직이는대로 따라가며 보는 것이라고 한다.
지불했던 돈은 다 환불받았다고 했다. 내가 우리보다 훨씬 더 잘사는 부국의 국민들까지 걱정할 바는 아니지만 여름한철 반짝 벌어먹고 살텐데, 이렇게 날씨가 변덕스러워서야 어디 돈벌겠나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밤새 비가 쏟아지면서 두통이 좀 일었다. 이제 비라면 지긋지긋하다. 비바람 소리 탓에 겨우 잠들었다.
7월6일 아침에 일어나니 다행히 다시 날이 갰다. 다만 어젯밤 비의 여파로 확실히 온도가 더 내려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여행안내서에 나와있는 볼거리를 꼭 찾아나서기보다는 어제 올랐던 모스케네스트라우멘 캠핑장(Moskenesstraumen Camping)에서처럼 한가로운 휴식과 여유로운 시간이 다시금 그리웠다. 나만의 공간찾기와 시간 보내기, 이렇게 자기만의 여행 스타일을 찾아가는 것 같다. 다음에 이렇게 오래 여행할 기회가 생긴다면 짐 없이 일정에 쫓기지 않고, 기행기를 쓴다는 부담도 없이 그저 자유롭고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여행 자체만 즐기고 싶다는 생각을 해봤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데, 배가 고팠다. 제대로된 식당이 있는 동네도 아니고 어제 점심에 무려 100크로네(약 2만원)를 주고 지독히 맛없는 파니니와 커피 한 잔을 마신 것을 빼고 뭘 제대로 먹은 기억이 없다. 루푸튼제도에 들어온 뒤로 마켓을 찾지 못해 먹을거리 장을 한번도 보지 못했다는 거. 이 마을 오(Å)의 중심가를 차지하고 있는 노르웨이 어촌 박물관에 1844년 세워져 옛날식으로 화덕에 빵을 굽는 빵집이 있어 여기서 갓 구운 빵을 사먹어야 한다는 추천을 받았지만 내가 별로 좋아하는 향이 아닌 시나몬롤이 주다.
이틀전 밤 피곤에 절어 도착한 버스정류소 쪽에 작은 건물이 있었던 것이 기억나 오솔길을 따라 나가보기로 했다. 버스가 지나왔던 작은 터널 옆 바위산 밑에는 지붕에 풀숲이 자라있는 목조건물이 있어 찾아가봤더니 기념품들과 음료수 몇 개, 마을안 빵집에서 가져온 빵을 파는게 다다. 갓구운 빵을 먹을 수도 있었건만 마지막 하나 남은 다식은 빵과 작은 우유팩 하나를 집어 허기를 면했다. 무려 38크로네(약 7500원 정도)
◇아기자기한 어촌박물관 마을
버스가 들어왔던 포장도로를 건너 보이는 것은 대구를 말리기 위해 설치해놓은 나무 지지대들이다. 관광 성수기에는 냄새 때문에 생선을 늘어놓지 않는 것 같다. 미처 거두지 못해 바닥에 떨어져있는 마른 대구 몇마리에 파리떼가 좀 붙어있는 것이 다다. 그래도 여전한 지독한 비린내를 뚫고 그곳을 지나니 또다른 신천지가 나타난다.
노르웨이에는 섬에도 피요르드 지형이 적용되는지 높고 험준한 바위산들 사이로 쭉 찢어져 들어온 듯한 바다가 많다. 바다가 그렇게 산 한가운데까지 호수처럼 들어차 있는 것이다. 이곳도 그렇게 보이는 지대다. 물결이 땅까지 찰랑찰랑 쳐들어오는데 바람에 쓸려오는 물살이 내는 규칙적인 리듬이 참 좋다. 어제 온 비로 진흙탕이 된 곳도 있었지만 조심스레 마른 땅을 찾아 밟아가며 물가로 다가가서 맛을 봤더니 민물이다. 물에 띄어놓은 조각배 두어 채만 물결을 따라 살랑살랑 흔들리는 풍경, 아 이 평화로움.
항상 사람이 붐비는 인구밀도 높은 도시에서만 살았던 나에게 이러한 자연의 여백은 낯설다. 하늘은 더더욱 드높게만 보이고 적막하기조차 하다. 맑고 꾸밈없는 자연을 마주하며 한껏 쌓여있는 세상의 때를 씻어내고 스스로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많이 가지게 됐다. 한국같은 경쟁적 사회에서는 이러한 생각들을 ‘잡념’으로 치부해버릴 지 모르겠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찬찬히 되짚어 보게 된다. 옹졸했던 내 마음도 반성해보는 계기가 된다. 내가 누구인지 더 잘 알게 된 시간들이다.
돌아나오는 길에 작은 텐트를 쳐놓고 홀로 캠핑 중인 나이든 남자가 하나 보이길래 “어제 그리 비가 많이 내렸는데 여기서 밤새 지냈느냐”고 물으니 “안전하고 괜찮았다”고 답변을 하고 손을 흔들어 보인다. 그리 방해받고 싶지 않은 표정인 듯싶었는데,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 외진 곳에 자리를 잡은 듯하다.
다시 마을 중심가로 돌아와 보니 새삼 참 아기자기하고 예쁜 마을이라는 생각이 든다. 바다를 둘러싸고 있는 로르부 지대를 골목골목 다니다 보니 작은 목제 배와 로르부 모형을 모아 늘어놓은 공터도 있고 흰 페인트칠을 한 나무 펜스를 세워놓은, 꽃이 만발한 정원도 보인다. 작은 정원에도 나름 의미를 부여해놨다. 별의 정원(Stjernehagen)이라 이름 붙은 곳이다.
영어안내판이 있어 읽어보니 오래된 이곳 영주의 저택에 1915년 만들어졌으며 부지런한 주인의 덕으로 역사적 식물들을 현재까지 보존해올 수 있었다며 2004~2009년 실행됐던 ‘루푸튼 역사적 정원’ 프로젝트에도 선정됐다는 내용이다. 별것 아닌 것 같아도 소복한 꽃들로 가득찬 작은 꽃밭을 지켜오고자한 한 가족의 노력이 오늘 먼 이국에서 온 관광객에게 소소한 즐거움을 준다.
카벨바그 지역에서 어업역사를 기념하는 루푸튼 박물관에 들렀던지라 이곳의 노르웨이 어촌 박물관까지는 가볼 생각이 없었으나, 시간이 남아 표와 함께 과자와 음료수 등을 파는 구멍가게를 겸한 목제건물에 들어섰다. 겨울에는 문을 닫는 박물관도 많건만 1년 내내 연다. 여름 한철(6월20일~8월20일)에는 오전 10~오후 6시 개장, 입장료는 성인 60크로네, 아동과 학생 30크로네. 취재를 좀 하고 싶다고 했더니 물건을 팔던 소년이 아버지를 부르는 듯하다.
주변이 다 헌 구깃구깃한 명함을 가지고 나온 중년 사내는 이곳의 총매니저인 Alf Jonassen씨. 시골 아저씨 풍모지만 얘기를 해보면 굉장히 진지하고 지적인 느낌을 준다. 사명감을 가지고 이곳을 운영하고 있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금발머리의 비쭉 키가 큰 아들을 보면 한때 그도 저런 미모를 유지했었을까 싶은데, 이들은 나이들어가면서 금세 머리가 벗겨지고 살이 쉽게 찐다. 세월이 그에게서 앗아간 것들이 좀 아쉬워졌다.
뮤지움이라면서 이것저것 파는 가게를 겸하고 있는 것을 무척 쑥스러워하는 듯 했는데, 이 동네에 딱히 마켓이 없어 관광객들을 위한 편의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대체 여기 주민들은 어디서 장을 봐오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한국인 이민자인 이철호씨가 만들어 히트친 미스터리 인스턴트 라면은 마켓마다 다 들어가 있는데 여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어 반갑다.
이곳 마을, 바다가 살짝 안쪽으로 들어선 곳에 철제 표지판을 세워놓았는데 소용돌이에 휩쓸린 배와 문어를 상징적으로 표현해놓아 귀엽다. 이 지역의 명물인 커다란 소용돌이(Maelstrom)에 대한 안내문을 부착해놓았는데 노르웨이어로만 돼있어 이에 대해 그에게 물어보니, 안쪽의 서점으로 안내한다. 여기서 관련 책을 사가는 관광객이 얼마나 될까 궁금했지만, 어쨌든 그는 벽 한편을 가득 책으로 채워놓았다. 나에게 이에 대한 설명이 나와있는 영어책을 복사해주기도 했다. 2000년전 그리스신화에도 바다 현상으로 언급됐으며 신이 보내는 경고의 의미로 알고 공포를 느꼈다는 내용이다.
역시나 여기서는 볼 수 없고 레이네 마을에 가서 거기에서 출발하는 바다 사파리에 참여하면 볼 수 있다며 그 시간은 신문을 통해서 예고된다고 말한다. (나중에 물어보니 홍콩처자들은 자전거를 빌려타고 레이네에 다녀왔다고 한다. 이 소용돌이를 보진 못했는데 우리에게 대구 요리를 나눠준 노르웨이 노부부는 배를 타고 나가 이 소용돌이를 구경했다고 한다)
내가 이렇게 ‘큰 소용돌이’에 집착하는 이유는 학창시절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 ‘큰 소용돌이에 휘말리다(A Descent into a Maelstrom)’를 읽은 기억이 강렬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북위 68도 노르웨이 해안의 낭떠러지에서 한 늙은 어부의 안내를 받아 직경 1마일 이상되는 거대한 소용돌이를 목격하는 내용인데, 그 배경이 바로 여기이기 때문이다. 그 소용돌이의 크기는 매일 매일 다르다는데, 이 소설에서는 이 소용돌이에 휘말렸던 이 어부는 그때의 공포로 백발노인이 됐지만 아무도 그 얘기를 믿어주지 않는다고 하소연한다.
내일 배를 타고 본토 도시 보되로 나갈 예정인데 이 쪽에서도 살트스트레우멘 소용돌이(Saltstraumen Maelstrom)를 볼 수 있다. 보되에서 33㎞쯤 떨어진 곳에 19번 버스를 타고 나가면 하루 네 번 볼 수 있다. 홈페이지에 정리를 잘해놨는데 세계에서 가장 격렬한 것으로 알려진 소용돌이라며, 매일 이를 볼 수 있는 시간까지 예측해 게시해놨다. 7월7일 아침 루푸튼제도에서 비행장이 있는 레크네스까지 이동해 노르웨이 국내 노선을 주로 운영하는 비행기 Widerøe를 타면 25분만에 보되로 나갈 수 있긴 하다. 이날 오후에는 2시48분, 8시40분에 볼 수 있다는데 9시10분 출발하는 트론헤임 행 기차를 타야하므로 시간을 잘 맞춘다면 딱 한차례 기회가 있는 것이라 무척 망설여진다.
어촌 박물관에는 오후 3시30분 배와 낚시 도구들이 보관된 보트하우스에서 시작하는 영어 가이드투어가 있긴 하지만 나는 그냥 지도를 따라 홀로 둘러보기로 했다. 지난 250년간의 노르웨이 어촌생활을 살펴볼 수 있는데,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구기름 공장에서는 옛날식으로 직접 짠 대구기름을 맛볼 수 있게 해놨다. 구역질이 날까 싶어 차마 먹어볼 엄두가 안 난다. 대구기름 램프 판매소, 역시 수공으로 이뤄지는 대장간, 당시 어부들의 가정생활을 들여다볼 수 있는 집들을 돌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오래된 살림기구, 재봉틀, 작은 소품들까지 잘 보존돼있다. 그렇게 1800년대 지어진 목조건물들을 돌아보다가 바위섬에 떼지어 앉아있는 갈매기들을 바라보며 부둣가로 슬슬 걸어나오며 커다란 대구를 나무 가건물 천장에 매달아 살을 발라내는 것을 구경했다.
갑자기 스티로폼 박스 한 가득, 살을 발라낸 후 남은 대구 ‘시체’들을 끌고 가던 한 나이든 남자가 “기러기들에게 먹이를 주러 가는데 나와 함께 보트 탈래”하고 소리를 지른다. 망설일 것도 없이 그가 운전하는 모터보트에 올라탔다. 스웨덴에서 왔다는 그 남자는 흰머리가 그득했지만 아주 활기 넘쳐 보였다. 그가 왜 그렇게 서두는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대구를 엄청 많이 잡아서 먹고도 남은 대구는 스웨덴으로 냉동보관해 실어가려고 포장 중이었다”면서 “이 찌꺼기들을 갈매기들에게 던질 테니 사진을 찍으라”는 제안이었다. 초스피드로 달리는 소형 모트보트가 물살을 가른다. 상쾌하다. 바다로 나가 배를 멈추고 이빨까지 달린 대가리와 살이 약간 붙은 뼈대만 남은 대구를 던지니 갈매기떼가 그야말로 미친듯이 달려든다. 나는 내 낡은 똑딱이 카메라로도 정말 멋진 사진을 건질 수 있었다.
다시 부둣가로 돌아온 그 남자 왈 “좋은 사진 찍었지? 이거 네 온라인 저널에 올려서 자랑할 수 있겠지” 하길래 “난 저널리스트거든. 블로그 말고 정식 저널 홈페이지에 이 사진을 공개할 거야” 했더니 이 중늙은이의 표정이 싹 변한다. 그러면서 손짓으로 거의 나를 내몰듯 하는 것이다. 내가 저널리스트라고 밝히면 표정이 안 좋게 변하는 남자들을 좀 경험했는데, 아마 만만하게 생각했던 동양여인이 언론인이라니 부담스러워서 싫은건지 아니면 그냥 기자라는 직업이 싫은건지 궁금해진다. 그렇다고 붙잡고 물어볼 순 없잖아.
방으로 돌아오니 홍콩처자들은 레이네에 갔었다며 사진을 보여주며 여기 꼭 가봐야한다고 강조를 한다. 역시 이것도 언제가 될지 모르는 다음을 기약해야하나. 나도 오늘 어떤 스웨디시 남자가 보트를 태워줘서 갈매기 먹이주는 것을 구경하고 왔다고 자랑하니, S가 갑자기 “네가 태워달라고 한거야? 아니면 그 사람이 태워준다고 한거야?”하고 물어본다. 그게 뭐가 중요한데? 내 참. 알 수 없는 콤플렉스로 속이 꼬인 S에게는 그게 참 중요한 문제인가 보다. 다시 여학교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다. 불쾌하지만 이럴 땐 그녀의 의도를 모른 척 하는 것이 최고. 난 순진무구한 표정을 해보이며 “아무 생각 없이 이러고 걸어가고 있는데, 그가 날 불렀어” 해줬다.
◇카페리를 타고 보되로 나가다
7월7일 아침이 왔다. 짧은 순간 우연에 의해 오 호스텔에서 만났던 젊은이들은 제 갈 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자신을 ‘비지맨’이라고 칭하던 검은 머리로 염색하고 검은 진에 검은 티셔츠로 록스타 흉내를 내고 있던 호스텔 노르웨이지안 총각은 거기 그렇게 계속 남을 터이다. 프랑스인 친구가 선물해줬다는 펭귄 인형을 안고 전세계를 떠돌아다니는 칠푼이 웃음소리의 ‘파티 애니멀’ 네덜란드 청년, 홍콩 처자들의 ‘미래의 건축가’라는 표현에 좋아하는 내색을 감추지 못하던 거친 영어 사투리를 쓰는 투박한 호주 청년, 그리고 홍콩 처자 C, S와 나. 만날 이유가 전혀 없었던, 먼 곳에서 온 여행자들은 각각 자기 길을 찾아 그렇게 떠났다.
나는 비행기 타기를 포기하고 역시 보되로 나간다는 홍콩 처자들을 따라가기로 했다. S는 거기서 아이슬랜드행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지속할 테고, C는 나의 다음 기착지인 트론헤임까지 가서 싱가포르로 가는 핀에어를 탈 예정이라 C와 함께 동행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보되에서 트론헤임으로 가는 밤기차는 오후 9시10분 출발해서 다음날 아침 7시47분 도착한다. 그녀와 함께라면 침대가 있는 비싼 캐빈을 예약하지 않아도 밤을 함께 지새기가 수월할 것 같아서였다. 그만큼 ‘친구’가 그리웠기도 했고, 긴 여행인데 무얼 꼭 보겠다고 새삼 무리를 하기도 싫었다.
토요일은 참 난감하다. 오에서 오전시간대에 카페리 선착장이 있는 모스케네스로 나갈 수 있는 버스는 평일과는 달리 오전 9시에 딱 한대. 여행을 다니다보면 날짜와 요일 감각도 희미해진다. 오늘이 토요일이라는 것을 잊고 하마터면 버스를 놓칠 뻔 했다. 홍콩처자들이 미리 알아놓은대로 따라가니, 오에 올때 내린 터미널 말고도 호스텔 뒤쪽 언덕가에도 버스정류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씩씩하게 어깨에는 노트북과 장비들이 든 배낭을 메고 캐리어를 끌고 움직이는데, 워낙 짐이 무겁다 보니 몸이 마음 같지가 않다. 이 와중에 S는 도와줄 것도 아니면서 나에게 계속 짜증이다. “김! 캐리어를 그렇게 잡지 말고 짧게 하고 잡아야지, 어쩌구~.” 우린 물론 전에 본 적도 없고, 부딪힌 일도 없었는데, 이상한 애다.
오늘 하루 한대 뿐인 버스를 놓치면 끝장이다. 서두르는 우리와 같은 버스정류소에서 조우한 스위스인 부부. 같은 호스텔에서 묵었는데, 남편은 이 바쁜 아침에 아내가 헤어드라이어를 빌려오라고 했다면서 방문을 두드리고 다니던 사내다. 마음씨 좋은 C가 자신의 헤어드라이어를 빌려줬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이 짧은 와중에도 이 남편은 동양처자들에게 장난을 치고 말을 걸고 싶어한다. “오늘 버스 취소됐다던데”라며 농담을 던져, 버스를 놓치면 모든 스케줄이 무너진다며 ‘버스 노이로제’에 걸려있던 나를 속여먹는데 성공했다.
눈도 밝은 것이 내 목에 걸려있는 태극기모양의 스마트폰 액정 닦이를 보고는 내가 한국인인 것을 딱 알아 맞힌다. 아마도 내가 홍콩여인들과 어울려 다니니 같은 홍콩인인줄 안 투숙객들이 많았을 터이다. 내가 “스위스도 정말 아름답다던데, 여기랑 비교하면 어떠냐”고 물어봤더니, 그는 “바다가 있는 것 말고는 비슷해. 하지만 물가가 정말 비싸. 체감으로는 한 두 배 되는 것 같아”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10여분만에 페리 선착장에 내렸다. 토요일인지라 티켓을 파는 판매소도, 카페도 다 문을 닫았다. 6월15일~8월5일에만 토요일 오전 10시30분에 모스케네스에서 보되로 가는 카페리(Torgatten Nord)가 운영된다. 표는 이동용 티켓판매기계를 목에 걸고 다니는 페리 직원에게 사면 된다.
건물 계단에 기대앉아 노트북을 펼쳐놓고 글을 쓰며 페리를 기다리는데 어느새 어제 나를 보트에 태워줬던 스웨덴인 노인이 나타나 홍콩처자들과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미 이 여인들과도 구면이었던 것. 이들도 보트를 태워줬다는 남자가 이 남자였냐면서 깜짝 놀란다. 동양여자만 보면 사족을 못쓰는 남자인가 보다.
이날 장장 4시간에 걸쳐 페리를 탔는데, 이런 식으로 중간 이동에만 배를 많이 타게 되니 정작 관광용 카약이나 보트를 타게 되지 않는 건 당연했다. 결국 모스케네스에서도 장을 보지 못했고 뭘 좀 먹어야할 것 같아서 페리 안 카페에서 연어 한조각과 삶은 계란 썬 것을 좀 얹은 카나페보다 조금 큰 오픈샌드위치 하나를 집었다. 가격이 무려 47크로네. 눈 튀어나올 가격이지만 이왕 집은 거 도로 물리기도 뭣해서 사먹었는데 간에 기별도 안 간 듯.
노익장을 과시하던 스웨덴 노인네는 자세히 보니 영화배우 숀 코너리를 좀 닮은 듯도 하다. ‘저널리스트’인 나는 계속 그의 관심 밖이고 그는 자기 일행은 어디에 뒀는지, 어느새 홍콩여인네들과 마주 앉아 “우리 예쁜 두 아가씨 (나 말고 홍콩여인네 2명에게), 노르웨이는 너무 비싸, 석유가 펑펑 나서 그런가봐. 스웨덴으로 오면 모든 걸 반값으로 즐길 수 있어. 스키, 스노보드 타러 와, 어쩌구” 정말 숨도 안 쉬고 두어시간을 끊임없이 얘기한다. 그의 얘기속에서 그에 대해 많은 걸 알게됐는데 “늙은축 4명, 젊은축 4명 등 8명이 한 팀이 돼 여행을 왔는데, 자기는 물론 늙은 그룹에 속하고 아들 셋에 딸 하나를 두고 있는데 아들 하나는 태국여자와 살고 있다”는 뭐 그런 얘기다.
쉴새없이 떠들 정도로 영어를 참 잘했는데 자신의 태국인 며느리에게도 “소수언어인 스웨덴어는 배워서 뭐 하냐, 영어를 익혀라”라고 한다고. 태국인 며느리 때문에 동양여인들에 대한 호감도가 급상승했나? S는 넙대대한 턱을 두손으로 받치고 그 작은 눈을 반짝 반짝 빛내며 그 늙은이를 뚫어질 듯 바라보며 맞장구를 친다. 그렇게까지 흥미로운 얘긴 아닌데. 스웨덴 숀 코너리는 그런 눈길에 더욱 흥이나나 보다. 미국식 영어발음은 정확해서 얘기는 쏙쏙 들어왔지만, 리스닝이 슬슬 피곤해지고 큰 목소리에 신경도 거슬려 갑판으로 나가봤다.
배를 많이도 탔지만 달리는 배 위 갑판에 나가 보는 풍경은 언제나 경이롭다. 멀리 바다 건너 바위섬이 보이고, 짙푸른 바다와 그보다 옅은 색의 하늘 사이에 그 중간색의 층이 한 층 보인다. 저게 뭐냐고 주변에 서있는 남자에게 물어보니 물안개 같다고 한다. 신비롭다.
배멀미가 두려워 멀미약을 두 알이나 먹었더니 졸음이 쏟아져서 비어있는 벤치에 가서 드러누워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깨어보니 숀 코너리가 사라지고 없다. 홍콩처자들에게 다가가서 “아 그 스웨덴인 남자, 진짜 말 많다” 했더니, S가 발끈 한다 “그는 좋은 사람이야!” 누가 뭐랬니, 내 참, 끝까지 황당하게 웃기는 애다. 백인 애호증이라도 있는 걸까, 언제 봤다고 그렇게 역성을 들어?
대중문화평론가 EriKim0214@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