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경술국치일에 조선의 국모를 생각한다
기사등록 2012/08/29 14:43:20
최종수정 2016/12/28 01:10:25
【서울=뉴시스】 노창현 뉴스로 대표기자
광복의 기쁨과 망국의 슬픔….
공교롭게 8월엔 우리 근세사에 잊을 수 없는 극과 극의 날이 공존합니다. 8월15일 광복절을 모를 한국인은 없지만 8월29일 국치일(國恥日)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합병’한 경술년(1910년) 8월29일. 이를 국가적 치욕이라 하여 ‘경술국치(庚戌國恥)’라고 부릅니다.
오늘은 102번째 맞는 경술국치일입니다.
광복의 기쁨 못지 않게 망국의 아픔을 기억하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다시는 이 땅에 치욕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일제는 1905년 을사늑약, 1907년 군대 해산으로 외교와 국방에 대한 주권을 단계적으로 강탈했습니다. 대한제국의 내무는 일제의 통감과 고문에 좌우되고 있었습니다. 사실상 대한제국은 1905년부터 일제의 꼭두각시가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일제는 대한제국을 완전히 흡수하기 위한 법적 명분을 만듭니다. 바로 합병조약입니다. ‘한일 합병조약’에 대해 분명히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한·일 합병을 조약으로 인정하면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1965년 박정희 정권이 한·일 수교를 맺으며 한·일 합병조약이 무효라고 합의했지만 일본은 ‘조약 자체는 합법적이었으나 이후 무효화된 것’이라고 주장했고, 우리는 ‘조약 자체가 무효’라는 입장을 보였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차대한 이견(異見)입니다. 우리가 원천무효라고 생각하는 조약을 일본은 절차에 문제가 없다고 우기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조선이 원해서 한 것이라는 얘기지요. 일본의 이 같은 자세는 오늘날 저들이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고 ‘독도 망언’을 되풀이하는 뻔뻔한 역사 왜곡의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한 나라를 ‘쭉정이’로 만들어놓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며 대신들을 협박 회유해 서명시킨 쓰레기 문서를 하자가 없다고 우기는 것이 지금의 일본입니다. 그나마 이 조약은 법적으로도 엉터리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서울대 이태진 교수는 “한·일 합방을 알리는 황제의 칙유가 일본 정부에 의해 작성됐으며, 순종이 이에 대한 서명을 거부했거나 하지 않은 사실이 자료로 확인됐다”고 불법성을 제기했습니다. 이태진 교수는 “한·일 강제 합방조약의 법적 결함은 결국 국제법상으로만 보아도 조약 불성립론을 입증하며 1910년 이후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식민통치도 아니고 일본이 한국을 불법적으로 강점한 상태”라고 강조했습니다.<출처 국가보훈처 블로그>
합병은 조약이라고 부를 수 없는 치졸한 사기극이요, 조선은 공식적으로 일본의 식민지가 아니었습니다. 단지 35년 간 한반도가 불법으로 강점됐을 뿐입니다.
박정희 정권이 국민들의 뜻을 무시한 채 한·일 수교조약을 맺고 일본의 불법 지배에 대한 배상을 몇억 달러의 차관으로 들여온 것은 치욕의 역사를 헐값에 팔아먹은 행위입니다. 언젠가는 한민족을 대표하는 ‘통일 COREA’의 정통성있는 정부가 일본의 책임과 사죄, 배상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경술국치일이 돌아오면 저는 분노의 응어리를 다독거리며 시간여행을 떠납니다.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明成皇后) 때문입니다. 명성황후의 죽음은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참살이었습니다. 한 나라의 국모가 어찌 이웃나라의 낭인(浪人)들에 의해 능욕당하고 궁궐 안에서 불타 죽을 수 있을까요?
일제는 '여우사냥'이라는 비밀작전을 벌였습니다. 조선의 침탈에 가장 방해되는 명성황후를 제거하고 대원군을 꼭두각시로 세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1895년 음력 8월20일(양력 10월 8일) 새벽 경복궁 안에 있는 건청궁의 옥호루에서 명성황후는 난입한 일본 낭인들의 손에 처참하게 살해당합니다. 시신마저 향원정의 녹원에서 불살라지는 수모를 당했습니다. 이른바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 사건)입니다. 이를 배후에서 지휘한 것은 일본 정부의 지시를 받은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였습니다.
명성황후가 비참하고 굴욕적인 최후를 마쳤다는 것은 단지 일제 낭인의 손에 목숨을 잃었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여성으로, 하나의 인간으로서 상상도 하기 힘든 끔찍한 만행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에조(英臟) 보고서’라고 들어보셨나요. 명성황후 시해사건 직후 일제 낭인패 중 한 명이 작성해 일본 본국으로 비밀리에 보낸 보고서입니다. 에조 보고서는 사건 발생 71년 만인 1966년 일본의 역사학자 야마베 겐타로(山健太郞, 1905∼1977)에 의해 최초로 알려짐으로써 그 동안 소문으로만 돌던, 명성황후에 대한 일본인들의 '윤간(輪姦)'과 '시간(屍姦)'의 근거가 됐습니다.
그러나 이 문서는 그 존재만 알려졌을 뿐 전문(全文)이 국내에 입수되거나 공개된 적은 없었습니다. 그것을 2002년에 소설가 김진명씨가 이 문서의 전문을 찾아냈고 오마이뉴스 정지환 기자에게 전달함으로써, 무려 107년만에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조선 정부 내부(內部, 요즘의 내무부) 고문의 직책을 가지고 있던 이시즈카 에조(石塚英藏)는 명성황후 시해 다음날 ‘여우사냥’의 주모자인 미우라 공사 몰래 상관인 일본 정부의 법제국장관 스에마쓰 가네즈미(末松謙澄)에게 장문의 보고서를 보냈습니다.
김진명씨는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에조 보고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명성황후가 시해 직전 즉 살아 있는 동안 능욕당하고 불태워지면서 죽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무리들은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왕비(王妃)를 끌어내어 두세 군데 칼로 상처를 입혔다(處刃傷). 나아가 왕비를 발가벗긴(裸體) 후 국부검사(局部檢査)(웃을(笑) 일이다. 또한 노할 일이다)를 하였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기름(油)을 부어 소실(燒失)시키는 등 차마 이를 글(筆)로 옮기기조차 어렵도다. 그 외에 궁내부 대신을 참혹한 방법으로 살해(殺害)했다.'
에조 보고서를 소개한 다른 글입니다.
'이 사건의 실행자는 훈련대 이외에 수비병의 후원이 있었다. 다만 수비병 외에 일본인 20명쯤이 있었다. 구마모토(熊本) 현 출신자가 다수를 차지하여 그들 중에 신문기자 몇명 또한 의사, 상인도 있었다. 따라서 양장, 화장(일본옷)이 서로 섞여 있었다. 특히 무리들은 깊이 안으로 들어가 왕비를 이끌어내고 두 세군데 칼질을 저질러 (상처를 입히고나서)나체로 하고 국부검사(말은 검사지만 실제로는 강간)를 하고 마지막으로 기름을 뿌려서 태워버렸다. 기타 궁내대신은 몹시 잔혹한 방법으로 살해했다고 한다. 위는 사관도 도와주기는 했지만 주로 병사 외 일본인들이 저지른 짓인 것 같다. 대략 세 시간 여를 소비하여 위막된 짓을 저지른후 위 일본인들은 단총 또는 도검을 손에 쥐고 유유히 광화문 (왕성정문)을 나가 군중 가운데를 뚫고나갔다. 그 때가 벌서 8시쯤이 지나고 왕성 앞에는 사람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너무도 충격적입니다. 이 내용을 옮겨쓰는 제 손이 부들부들 떨립니다. 인간의 탈만 썼을 뿐 저들 살인귀 앞에선 악마조차 고개를 돌릴 것입니다.
죽은 사람을 범하는 것을 시간(屍姦)이라고 합니다. 발가벗겨져 윤간당하고 칼로 찔려 살해한 것도 모자라 시간의 악랄한 만행속에 온 몸이 불태워진 것입니다. 다름아닌 조선의 국모가 말입니다.
임진왜란, 정유재란에 걸쳐 한반도를 쑥대밭으로 만들며 코무덤, 귀무덤에 일본군 성노예, 강제징용, 생체실험 등 누대에 걸쳐 일본이 저지른 악행과 만행은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능가하고도 남습니다.
그중에서도 명성황후 참살은 인류역사상 최악의 잔혹한 살인과 시신 모독일 것입니다. 일본은 지금이라도 구천을 헤매는 명성황후의 한서린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일본아~. 한번 상상이라도 해보거라. 조선의 부랑아들이 너희 나라 궁궐에 몰려가 왕비를 붙잡아 발가벗겨 돌아가며 윤간하고 칼로 찔러 잔혹하게 살해했다면? 그것도 모자라 동물도 할 수 없는 시간의 악행을 저지르고 석유를 뿌려 불태우며 ‘대한제국 만세’를 외쳤다면? 과연 무슨 일이 벌어졌겠느냐? 일본왕이 석고대죄한들 만고에 사무친 원한이 가실 수 있겠느냐?”
일제의 국모 살해는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적으로도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조선 전역에서는 왕비 살해의 원한을 갚자며 을미의병이 일어났고 국제적으로는 일본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은 21살이던 1896년 황해도 진남포에서 조선인으로 위장한 칼 찬 일본인을 을미사변의 공범으로 판단, 폭행 살해했습니다. 그리고 “국모인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기 위함”이라고 일성을 토한후, 자신의 거처를 적은 포고문을 길거리 벽에 붙이고 집에서 좌정한 후 체포됐습니다.
만일 명성황후에 가한 일본 낭인들의 참살 만행이 까발려졌다면 모든 조선 백성이 백범 김구 선생의 심정으로 봉기하지 않았을까요.
명성황후에 대한 외국의 기록을 보면 가냘프지만 영민하고 총명하며 나라를 위해 노심초사하는 여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세기 말 한국을 다녀간 영국의 비숍 여사는 명성황후를 알현한 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왕후는 가냘프고 미인이었다.… 눈은 차고 날카로워서 훌륭한 지성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명석하고 야심적이며 책략에도 능할 뿐 아니라 매우 매혹적이고 여러가지 면에서 매우 사랑스러운 여인이었다.'
선교사 언더우드의 부인의 말입니다. '그녀의 지식은 주로 중국에서 얻은 것이었지만 세계 강대국과 그 정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많은 질문을 던졌고 자기가 들은 것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섬세한 감각을 가진 유능한 외교관이었고 반대세력의 허를 찌르는 데 능했다.… 그녀는 일본을 반대했고 애국적이었으며 조선의 이익을 위해 몸을 바치고 있었다.… 그녀는 아시아의 그 어떤 왕후보다도 그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여인이었다.'
또한 윌리엄 프랭클린 샌드는 “뛰어난 학문과 지성적인 강한 개성과 굽힐 줄 모르는 의지력을 지녔으며, 시대를 추월한 정치가이자 외교가로 조선의 독립을 위해 애쓴 분이었다”라고 썼습니다.
반면 일본의 화가들이 그린 명성왕후의 삽화는 모두 뚱뚱하고 심술궂게 묘사돼 있습니다. 광기어린 침략전쟁의 주구들에게 명성황후는 '여우'에 불과했습니다. 후쿠오카 쿠시다 신사에 보관 중인 명성황후를 시해한 '히젠도(肥前刀)의 칼집에는 '늙은 여우를 단칼에 찔렀다(一瞬電光刺老狐)'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민자영(閔玆暎) : 1895년 8월29일 45살을 일기로 승하한 조선 국모의 본명. 경술국치일을 맞아 검은 넥타이를 매고 찬 죽을 먹지는 못할 망정, 당신의 죽음은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 노창현 뉴스로 대표는 1988년 스포츠 기자로 언론 입문, 스포츠서울 뉴욕 편집국장(2003∼2006년), 뉴시스통신 뉴욕 특파원(2007∼2010)을 역임했다. 2006년 ‘소수민족 퓰리처상’(뉴아메리카미디어)을 한국언론인으로는 처음으로 수상했고 2009년 US사법재단 선정 올해의 기자상을 CBS-TV 앵커 신디슈와 함께 공동 수상했다. 현재 ‘글로벌웹진’ 뉴스로(www.newsroh.com)의 대표 기자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