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졸업을 앞둔 고려대학교 디자인학부 A(25·여)씨는 겨울방학을 토익학원에서 보내야했다. 자신의 원하는 조경회사에 취직을 하기 위해 일찌감치 준비를 마쳤지만 대학 졸업요건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A씨가 최근 지원한 조경회사에서는 토익점수를 요구하지 않았다. 하지만 A씨가 다니고 있는 고려대의 졸업요건에는 일정 수준의 이상의 토익점수가 포함돼 있다. 일정 수준의 토익 점수를 받지 못할 경우 사실상 졸업장을 받기가 힘들다. 학적상태가 졸업이 아닌 수료 상태로 기록된다.
결국 A씨는 급한 마음에 부랴부랴 서울 동작구 대방동에 있는 토익학원에 등록했다. 학원비 38만원과 교재비 35만원 등 80여만원을 지불하고 2개월짜리 속성 토익수업과 인터넷 강의 등을 듣고서야 졸업여건에 맞는 토익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
"전공마다 차이가 있고 공인영어점수가 모두 필요한 것도 아닌데 졸업요건에 공인영어점수를 포함시키는 것은 비효율적이고 납득하기 어려워요."
A씨는 "졸업장을 받기 위해서 비싼 학원비가 부담되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며 "대학에서 진행하는 영어강의로는 졸업요건에 해당하는 영어점수를 받을 수가 없어 결국 비싼 돈을 다시들여 사교육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이에 대해 고려대 관계자는 "2003년부터 사회 전반적으로 영어와 한자 능력을 요구했다"며 "한자는 학부별 선택으로 자율적으로 바꾸고 영어의 경우 아직 우리 사회에서 필요하다고 판단해 의무조항으로 두고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학교에서 요구하는 졸업요건 기준보다 기업이 요구하는 영어점수가 훨씬 높다"며 "학생들에게 높은 점수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제한 점수를 충족시키라고 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고려대는 올해 수준별 영어수업을 교양필수로 지정했다. 지난 20일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시험을 치러 그 결과를 바탕으로 수준별로 나눠 수업을 진행할 예정이다. 최저등급을 받은 학생의 경우 계절학기 때 무료로 수강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일부 대학들은 재학생들에게 논문과 공인영어성적, 컴퓨터 자격증, 복수전공 의무와 같은 까다로운 졸업요건을 요구하고 있다. 졸업학점을 모두 이수하더라도 졸업요건을 충족하지 못하면 사실상 졸업을 할 수 없다.
대학생들은 졸업을 하기 위해서 '울며겨자먹기식'으로 졸업요건을 맞추기 위해 사교육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며 불만을 쏟아냈다.
고려대 3학년에 재학중인 박모(27)씨는 "개인의 상황과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일률적인 졸업요건을 내세우는 것은 불필요하다"면서 "졸업요건을 맞추기 위해서 사교육에 의존하게 되고 결국 학원들 배만 불려주는 꼴이며 학교는 스펙 쌓는 공장에 불과하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숙명여대 3학년에 재학중인 서모(23)씨는 "졸업요건을 맞추기 위해서는 학교수업만으로는 벅찬 일"이라며 "개인의 필요로 인해서 선택할 수 있는 공인영어성적이나 자격증을 학교가 강제적으로 강요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익명을 요구한 서울의 모 대학 관계자는 "졸업생 가운데 대기업에 얼마나 많은 졸업생이 취직을 하느냐가 그 대학의 명문도를 평가하는 기준이 된지 오래"라며 "신입생 유치와도 연관있는 취업률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라도 대학마다 교양보다는 스펙쌓기에 치중할 수밖에 없다"고 털어놨다.
전문가들은 모든 대학이 학생들에게 똑같은 졸업요건을 갖추라는 것은 지양해야 된다고 지적했다.
연덕원 한국대학교육연구소 연구원은 "졸업요건에 토익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과연 필요한 것인가 의문이 든다"며 "각 과마다 특성이 다른데 천편일률적으로 공인영어성적을 졸업요건으로 지정하는 것은 학생들이 추가비용을 지불하고 학원 등 사교육에 의존할 수 밖는 악순환의 반복을 가져온다"고 지적했다.
연 연구원은 "취업난 때문에 토익공부를 안할 수 없겠지만 거의 모든 대학에서 똑같이 토익점수를 졸업요건으로 만든 것은 지양해야 한다"며 "실제 모든 학교가 졸업인증제로 자격증 취득에만 몰두하면 전공은 의미없고 졸업장이 아니라 '00대학 자격증'으로 변질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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