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대신 목판에 산수를 스케치하고 드릴로 구멍을 뚫은 뒤 그곳에 이쑤시개와 성냥을 꽂아 불로 태우는 방법으로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어 낸다.
이쑤시개나 목판의 나뭇조각들은 소멸하지만 그을음이 남아 전반적인 산수를 표현한다. 불을 통해 원형의 이미지는 없어지지만, 불로 인해 남은 흔적은 새로운 이미지가 탄생하는 것이다.
작가는 “우주의 근본적인 원리인 도(道)는 전통 동양화에서 수묵을 통해 표현된다”며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끊임없이 생성되고 소멸하는 과정, 즉 유무순환(有無循環)의 구조 자체만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라고 밝혔다.
우주도 마찬가지로 이 구조 속에 있다고 봤다. “태초의 빅뱅이 일어나기 전에 또 다른 우주가 있었을 것”이라며 “이 우주가 소멸이 되면서 모든 에너지가 하나로 응축돼 다시 태어난 게 현 우주”라고 설명했다.
“이전의 우주와 빅뱅 이후의 우주는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동시에 겪었고, 이 과정은 현재에도 일어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일어날 것이다. 이러한 생성과 소멸의 무한 반복은 ∞로 기호화된다”며 “이 기호의 겹쳐지는 가운데 부분은 생성과 소멸이 동시에 일어나는 지점”이라고 강조했다.
“한쪽 원 부분이 생성에서 소멸로 가는 우주이고 나머지 한쪽 원 부분이 소멸에서 다시 생성돼가는 우주다. 즉, 생성과 소멸의 무한순환이 곧 우주이고 도이다.”
한씨는 이러한 도의 개념을 바탕으로 작업한다. 자신의 작업은 “지필묵의 전통적인 방법과는 다르다”고 구분한다. 작업 과정에서 불은 기존의 이미지를 태워서 없애지만, 작품 자체가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는다. 타는 도중에 생긴 그을음이 만들어 낸 우연한 효과가 새로운 이미지로 재탄생한다.
작업에서의 흔적들은 이러한 양면성을 동시에 보여준다. 또 이미지의 생성과 소멸의 과정은 ∞의 교차점을 드러낸다. 이 교차점은 곧 중도를 의미한다. “중도라는 것은 양극적인 입장의 가운데가 아니라 항상 변하는 것의 중심을 자리잡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전통 수묵에서 추구하는 것을 내 나름의 방법을 통해 작업으로 표현했다.”
작품에 전반적으로 등장하는 ‘산’이라는 소재는 전통 수묵화에서 가장 많이 다뤄진다. 작가는 그 소재를 통해 전통 수묵의 맥락을 잇는다.
“산은 항상 그 자리에 가만히 있지만, 변화를 멈추지 않는다. 특히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의 산은 계절마다 색이 바뀐다”며 “생성과 소멸이라는 과정을 자연스럽게 따라가며 몸소 실천하기 때문에 산은 그 자체로 우주의 근본적 구조에 가장 적합한 존재라 할 수 있다”는 판단이다.
그는 생성과 소멸이라는 양면성을 분리하기보다는 하나로 인지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생성과 소멸이 무한히 순환하는 과정이야말로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며, 우리가 가장 자연스러운 사람이 될 때 우리는 모든 기준과 생각들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 대치동 송은아트큐브에서 생성과 소멸의 순환과정을 담은 최근작 15점을 21일부터 11월30일까지 선보인다. 02-3448-0100
swryu@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