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독일은 프랑스와 영국에 비해 후진국이었다. 이 두 나라는 벌써 경제적인 도약을 한 축에 들었다. 특히 영국은 2세대까지 이어질 정도였다. 이런 나라에 비해 독일은 아직 씨 뿌리는 농경생활, 베 짜는 것도 손으로 하고 있었다. 베를린 같은 경우는 공장에서 기계가 움직이고 있었지만, 시골에는 아직도 일부는 제후들에게 의존하면서 살았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자유가 주어졌다. 하녀, 종들이 결혼을 하고자 할 때 더 이상 소속 귀족에게 허락 받지 않아도 됐다. 그런 기근에다 대량으로 공장에서 찍어낸 제품들이 값싸게 들어오자 더 먹고 살기 힘들어졌다. 수공업자들의 수익도 줄어들었고, 대부분은 감자로만 끼니를 겨우 때웠다. 이렇게 계속 기근에 시달리게 되자 시민들의 폭동이 언제 일어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지나간 프랑스의 전철을 잘 보았던 터였다. 이때 사람들이 이민을 꿈꾸기 시작하자 적극적으로 이민을 장려했다. 심지어 부추기기까지 했다. 만일에 생길 폭동을 잠재우는 유일한 방법으로 해석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독일인들이 이민을 꿈꾸던 곳이 대개는 미국이었다. 비행기도 없던 그 시대 한 번 배를 타면 평균 50일이 걸리던 시대였다. 배는 큰가? 아주 작은 배에서 고생했다. 3.3㎡에 평균 5명이 웅크리면서 머물렀던 열악한 조건이었다. 특히 배 안의 물이 부족할 땐 더 힘이 들었다. 불결한 환경 때문에 콜레라, 장티푸스도 예사로 생겼다. 그래서 꿈의 나라에 도착 하기도 전에 약 10% 정도는 죽음을 맞이하기도 했다. 1853년 미국 가는 배 72척이 브레멘 항구를 출발했다. 2만9900명이 배에 탔다. 도착하기도 전에 2300명이 죽었다. 반대로 그 당시 배를 가졌던 선장과 그런 이민을 안내했던 사람들은 떼돈을 벌었다.
한 지방의 예를 보자. 프랑크푸르트 남쪽에 있는 헤센 지방인 그로스 짐머른이라는 곳이다. 이곳에서 이민 떠났던 이들은 주로 일일 노동자, 농부들, 수공업자들이었다. 350명 정도가 41개의 마차에 갈라서 탔다. 겨우 생후 몇 달 된 아이, 나이 많은 이가 71살, 산 달이 가까워 오는 두 젊은 여인도 타고 있었다. 이 수레에는 아담 가이스라는 가족도 실렸다. 11살의 페터, 7살의 안나, 그의 부인 마가레타는 겨우 두 살 된 젖먹이를 무릎에 앉히고 있었다. 지금 미국에서 ‘가이스’ 라는 가문이 있다면 분명 이들의 핏줄이리라! 얼마나 큰 모험 이었겠는가. 불확실한 미래를 안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이들은 부푼 꿈을 꾸었기에 기분 좋은 표정으로 떠났다. 관청은 이런 가족들이 떠나게끔 일부러 부추겼다. 읍장은 이런 이들을 떠나보내기 위해 5000 굴덴(화폐단위)을 보조까지 해주었다. 하루 만에 많은 이들이 이렇게 떠났고, 일주일 후 다시 수 백 명이 떠나 버렸다. 4분의 1정도가 이렇게 떠나 버리자 마을은 텅텅 빌 정도가 되었다. 마치 칙칙하던 피를 사혈시켜버린 것처럼 읍장과 관청은 기뻐했다 한다. 이들도 ‘이런 사람들’을 도와주는데 진절머리를 앓고 있던 차였기 때문이다.
1846년의 상세하게 남아있는 한 기록을 보자. 결혼해 한 가정의 가장이었던 하인리히 뷔히너라는 사람이다. 그 해 봄 감자 수확량이 형편없이 줄어들었다. 그에게 딸린 식구는 6명이었다. 나무 장작을 집에 모아 두고서는 그는 으름장을 놓았다. 우리 가족이 이민갈 수 있도록 자금 조달을 해달라고. 그렇지 않으면 불을 지르겠노라고. 사실 그는 이민가기 위해 가진 재산을 다 팔았다. 그렇지만 빚도 아직 다 갚지 못했던 것이다. 또 이 남자는 채권자 집에 불을 지르고 살해하겠다는 말까지 퍼뜨렸다. 1년 전에 이민 간다고 돈 50굴덴을 챙겨 먹고는 달아난 사람이 있었기에 읍장은 선별에 좀 신중을 가하던 차였다. 다른 상황인걸 알아 챈 읍장이 곧 중재에 나섰다.
그는 채권자를 불러서 타협했다. 뷔히너처럼 빚 있는 자를 눈 딱 감고 놓아주자고. 이민 보내 버리자고. 채권자도 골똘히 생각해 보더니 같은 결론을 내렸다. 이런 가족들이 여기 있어봐야 자기에게 평생 빚 갚을 능력이 없다는 것을 넌지시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연이어 법원에서도 42명의 죄인을 이민 보내 버리자는 결론을 내렸다. 이들이 어차피 형을 살고 나와야 다시 도둑질이나 사기로 먹고 살 것이다. 그러면 다시 사회적인 짐이 된다는 이유였다. 즉 이런 사람들이 이 마을에 있어 봐야 빵만 축낸다는 것이다. 떠나는 이들은 신발 한 켤레, 스타킹, 그리고 옷과 목사들로부터는 성경책을 선물로 받았다. 읍장은 유럽과 미국 사이에 담배 무역업을 하던 간덴베르거와 손을 잡았다. 어른은 71굴덴, 12살까지의 아이들은 56굴덴, 젖먹이는 공짜로 머리 숫자만큼 배 값을 지불해 주었다.
세월이 흘렀다. 이런 저런 사연을 뒤에 두고 고향 그로스 짐머른을 떠났던 이들의 소식은 주로 편지로 전해졌다. 이런 편지들이 자료로 남아 있다. 1788년에 쓴 편지다. 우리는 미국에서 거대한 농장을 소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소와 28마리의 젖소까지 키운다고. 우리는 빵보다 고기를 더 먹고 있고, 물 보다 와인과 커피를 더 마신다고. 이런 내용들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더 발동시켰다.
1830년에는 1만 명 가량이 대단한 꿈과 희망을 지니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몇 년 후 뉴욕신문에 헤센 출신의 요한 헬드라는 사람이 광고를 냈다. 큰 강당을 빌려 헤센 축제를 연다는 것이었다. 우리로 치면 경상도 사람끼리 설 명절 함께 보내자는 의미와 유사하다. 1844년 23살 먹은 하인리히 레만이라는 독일 사람은 그의 동생과 함께 목화무역업을 하여 크게 성공하였다. 보따리장수의 아들이었던 룁 스트라우스는 엄마와 두 여동생을 데리고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했다. 이들은 청바지사업으로 또한 크게 성공했다. 다름 아닌 오늘날 젊은이들이 즐겨 입는 ‘리바이스i’라는 상표다.
1820~1920년 독일인 10만 명 이상이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이들의 이민은 끝이 없었다. 물론 이젠 가난 때문에 가는 것은 더 이상 아니다. 더 좋은 조건 속에서 일하고 돈도 더 벌기 위해서다. 2006년에는 1만8242명의 독일인들이 스위스로, 1만3200명이 미국으로, 1만300명이 오스트리아로, 9300명이 영국으로, 9100명이 폴란드로, 8100명이 스페인으로, 7500명이 프랑스로, 3600명이 캐나다로, 3400명이 네덜란드로, 3300명이 터키로 떠났다 한다. 합 14만4815명의 독일인들이 독일을 떠났다. 2009년에 73만4000명이 독일을 떠났다. 특히 스위스는 독일과 가깝다. 주된 이유는 독일의 무거운 세금을 피하기 위해서다. 그 한 예가 유명한 테니스 선수인 보리스 베커다. 그가 독일에 오면 아주 비싼 호화 호텔에 머문다는 기사를 접한 적이 있다. 미국으로 가는 독일인들은 주로 전문 직업인들이다. 독일보다 더 좋은 조건으로 일하고 또 월급도 많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이민사도 있다. 때로는 망명처로, 때로는 생활의 곤궁을 면하기 위해 신천지를 찾아 나섰던 이들이었다. 102명이 1902년 12월 인천항을 떠났다. 그 당시 하와이 농장에서 일할 사람을 찾는 모집광고를 보고 결정했던 이민그룹이었다. 그 이후 약 3년 동안 65척의 배가 7000명가량을 하와이에 실어 날랐다. 그 다음의 이민은 태평양을 건너는 여성들이었다. 이들은 한국인 남성 노동자와 결혼하기 위해서 떠난 것이었다. 일부 부유층만이 해외 이민을 생각할 수 있었던 때도 있었다. 대략 1940년대부터다. 그리고 빠질 수 없는 것이 미군과 결혼했던 미군부대 여성들이다. 이들은 1950년께 미국으로 많이 떠났다. 미국이 아닌 유럽을 보자. 정부는 독일정부로부터 차관을 얻는 조건으로 1963년부터 광부·간호사를 독일로 보냈다. 이 분들이 독일에서 많은 고생을 하였음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2세들을 잘 키워냈다. 교육열 높은 한국인들이 여기라고 벗어 던지겠는가. 많은 2세들이 의사, 교수, 약사, 변호사, 회계사, 사업가가 되어 한국인의 위상을 독일 도처에서 높이고 있다. 최근엔 가톨릭의 2세 신부까지 나왔다. 같은 시기에 노동 이민 왔던 터키인들에 비해 아주 잘 키워낸 2세들이다. 터키인들은 교육열이 너무 낮아서 오히려 독일 정부로부터 늘 지적 받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터키인들 중엔 잘 된 이들도 있다. 다만 한국인의 교육열에 비교했을 다름이다.
이젠 우리의 이민 성격도 바뀌기 시작했다. 대략 1990년대 중반이 되면서부터였다. 더 이상 잘 살아 보자는 구호 아래서가 아니었다. 먹고 살만해졌다. 이젠 어디가 더 살기 좋은 곳인가를 찾았다. 이런 이민은 은퇴한 노년 부유층을 중심으로였다. 주로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로 옮겨갔다. 2000년대에 들면서 또 한 번 변화가 있었다. 한국보다 생활비가 적게 드는 동남아로 이주하는 중산층 노인들이 생겨났다. 이들이 택한 나라는 주로 필리핀, 태국이었다. 우리나라의 이민사도 살펴보니 100년 전의 독일인들의 이민 모습과 유사한 점이 많다. 처음은 먹고 살기 위해, 그 다음은 살기 좋은 조건을 갖춘 곳으로 떠났으니 말이다. 이런 양국의 이민사를 통해서도 느껴진다. 늘 삼각형의 꼭짓점을 오르려고 하는 인간의 긍정적인 발버둥.
비교종교학 박사 ytzm@hotmail.com
※이 기사는 뉴시스 발행 시사주간지 뉴시스아이즈 제228호(5월30일자)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