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딱하고 지루한 노, 쉽고도 재미있는 가부키

기사등록 2011/04/09 08:51:00 최종수정 2016/12/27 22:00:04
【서울=뉴시스】윤소희의음악과 여행<43>  

 지금이야 가부키가 대세지만 일본 전통 가극(歌劇)의 정수라면 뭐니뭐니해도 노(能·No theatre)였다. 무로마치(室町 1333~1573) 시대에 사무라이 무사들의 후원으로 생겨난 ‘노’는 아시카가 칸나미 키요츠구(1333~1384)와 그의 아들 제아미 모토키요(1364~1443)가 효시다. 당시 정권을 잡은 아시카가(足利)장군의 든든한 후원 아래서 제아미는 2000여 작품을 만들었다고 하니 그의 무한한 창의력과 에너지가 놀랍기만 하다.

 제아미의 작품 중 상당 수가 현재까지도 연행되고 있는데, 초기에는 사찰의 후원까지 얻으며 장외 공연까지 할 정도로 일반 서민들에게서도 큰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에도시대(江戶 1603~1867)에 이르러 봉건 영주들의 취향에 맞추다 보니 차츰 형식화되고 고급화(?) 되면서 본래의 유흥적 성격이 사라지게 됐다.

 지금도 ‘노’의  무대와 연행은 항시 일정한 틀을 지니고 있어 경직된 면이 없지 않다. 주 무대, 옆 무대, 뒷 무대 등 세부분의 세트를 짜야 하고, 주 무대의 통로는 뒷 무대의 왼쪽에 이어져 있어야 한다. 객석 정면에 주무대를 배치하고, 옆 무대에는 합창단이, 뒷 무대는 극을 반주하는 악인들이 자리해야만 하는 것이다. 

 무대와 통로는 객석보다 136㎝ 높게 세워진 마루바닥이어야 하고, 주 무대의 네 모퉁이에 사각의 나무 기둥이 서 있고, 네 기둥 위에는 일본식 건축 양식으로 꾸며진 석가래가 얹혀 있다. 뒷 무대의 벽에는 큰 소나무가 그려져 있는 것 외에는 아무런 무대 장치가 없아야 하고 주 무대로 통하는 통로에는 작은 소나무 세 그루가 있는 것이 ‘노’의 일관된 틀이다. 이러한 무대는 실제로 보면 삭막하다 싶을 정도로 절제되어 있는데 그 중에 유일하게 소나무만이 장식되는 것은 일본의 귀족들이 소나무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는가를 말해준다.      

 중국의 경극이나 가부키 배우들의 화려한 의상이나 치장과 달리 ‘노’의 배우들은 매우 절제된 분장을 하고 있다. 주인공인 시테(シテ), 조연인 와키(ヮキ), 어린 광대인 교겐(狂言)이 주요 배역이다. 시테는 무용과 노래, 연기를 주도적으로 하는데 연기와 대사의 전달이 매우 형식화돼 있어 배우가 하는 동작의 상징적인 뜻을 모르면 내용을 알아듣기 어렵다. 

 ‘노’의 배우들은 모두 남자들로 구성되므로 한 공연에서 한 배우가 여자역할을 했다가 남자역할도 한다. 예를 들어 제1막에서 무사로 등장했다가 제2막에서는 젊은 여인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노의 음악 또한 정해진 형식대로 연주된다. 옆 무대에 앉은 합창단에서 여러 사람이 제창으로 노래를 하고, 뒷 무대에서는 반주를 맡은 악사들이 연주를 한다. 노래 선율은 정해진 고정 선율로 구성돼 한국 사람들이 듣기에는 선율이나 리듬의 변화가 거의 없는 듯 하다. 

 한국의 대금과 같이 생긴 노칸(能管)과 세 개의 북이 함께 연주된다. 북의 종류를 보면 북틀에 걸어 놓고 치는 다이코(太鼓), 중간 사이즈인 오츠즈미(大鼓), 작은 사이즈인 고츠즈미(小鼓)가 있다. 즉 하나의 관악기에 세 가지 북이 반주하는 형태인데 전문가들이나 이 음악의 마니아급의 청중들에게는 기품있는 음악일지 모르지만 보통 사람들 귀에는 딱딱하고 지루한 음악이다. ‘노’의 이러한 성격으로 인해 서민들과 급속도로 멀어져 갔는데 바로 그 자리에 쉽고도 재미난 악극이 자리하게 됐으니 그것이 바로 가부키다. 

 교토의 서쪽, 지금의 시마네현의 이즈모(出雲)에서 태어난 오쿠니(阿國)라는 여자 무당에 의해서 시작된 가부키는 넨부츠오도리(念佛踊), 일명 후류오도리(風流踊)라는 불교춤을 바탕으로 아주 단순한 무용극을 만들었다. 오쿠니가부키는 우리나라의 사당패와 같은 여배우들에 의해서 주로 교토지방에서 행해졌는데, 이것이 점차 확대되어 도시의 상인들과 시민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여배우들에 의해서 공연된 오쿠니가부키 또는 온나가부키(女歌舞技)는 기생들의 유희적 춤과 노래의 성격이 짙다보니 풍기문란으로 여러 차례 탄압을 받기도 했다. 여론의 따가운 시선을 피하고자 여배우 대신에 어린 남배우를 들여서 와카슈(若衆) 가부키가 생겨나기도 했는데, 이는 남배우에 의해서만 연주되는 노의 영향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마저도 남색(男色)의 문제로 사회적 질타를 받으면서 1650년 무렵에는 어린 남배우 대신에 어른 남배우가 어린 역할도 맡았으니 세상 어디인들 남녀로 인한 문제는 비슷한 모양새라 ‘패왕별희’와 중국 배우 장궈룽의 애사(哀史)가 다시금 떠오른다.

 인기가 많다 보니 갖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가부키는 발전을 거듭하여 세련되고 화려한 가극으로 성장해 갔다. 가부키의 줄거리는 갈수록 장대해져서 요즈음은 전막 공연 중 1장이나 2장과 같이 특정한 부분만 관람할 수 있는 티켓도 있다고 한다. 아무튼 일본 문화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전세계적으로 알려진 가부키가 이토록 성행하게 된 것은 오키나와의 인형극 분라쿠(文樂)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분라쿠의 이름은 인형이라는 뜻인 닌교(人形)와 ‘이야기꾼’이라는 어원을 지닌 조루리(浄瑠璃)가 합쳐진 것인데, 가부키 중에는 ‘조루리’를 가부키화 한 것이 많다. 

 작곡가·음악인류학 박사 http://cafe.daum.net/ysh35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