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나미 피해를 막은 노인

기사등록 2011/03/26 08:59:00 최종수정 2016/12/27 21:55:24
【서울=뉴시스】차길진의 시크릿 가든<94>  

 2005년 12월 말 인도양 40여 개국을 덮친 쓰나미로 한국관광객을 포함한 수많은 인명이 희생됐다. 바다는 세계인의 비통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느새 평온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해일 사태로 세계에 알려진 ‘쓰나미(tsunami)’란 말은 일반적인 해일과는 달리, 지각균열이나 화산 폭발 등으로 발생하는 거대한 파도를 말한다.

 1946년 4월1일 알래스카 근처의 우니마크 섬에서 진도 7.2의 지진이 발생했다. 높이 7.8m의 해일이 하와이를 덮쳐 165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때의 해일을 일본계 하와이 사람이 쓰나미라고 부른 것이 훗날 국제용어가 됐다.

 일본이 쓰나미란 말을 사용한 것은 쇼와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자표기로 진파(津波), 즉 ‘항구의 파도’란 뜻으로 선착장에 밀려오는 파도를 보고 그렇게 불렀던 것 같다. 필자는 이 쓰나미라는 말이 낯설지 않다. 어머니께서 일본 국어 교과서에 실린 글이라며 쓰나미의 어원에 얽힌 옛이야기를 들려주셨기 때문이다.

 어느 해변가 언덕에 도를 닦는 노인이 살고 있었다. 하루는 이상한 예감이 들어 주위를 살폈다. 평소 같으면 새소리와 짐승들의 발자국 소리로 시끄러울 텐데 그날따라 풀숲에 이는 바람소리 밖에 들리지 않았다. 주위에 짐승들의 흔적도 없었다. 어디론가 모두 이동한 것이 분명했다. 노인은 설마하며 수평선을 바라봤다. 그때였다. 멀리서 집채만 한 파도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무서운 속도로 육지를 향해 달려오는 게 아닌가.

 ‘큰일 났다!’ 노인은 마을이 밀집해 있는 해안가를 내려다봤다. 마을 주민들은 거대한 파도가 밀려오는 줄도 모르고 평화롭게 일상을 즐기고 있었다. “피하시오. 쓰나미가 오고 있소.” 그러나 마을까지 노인의 목소리가 들릴 리 없었다. 해안가로 내려간다면 이미 파도가 마을을 집어삼킬 게 뻔했다. 조급해진 노인은 할 수 없이 자기 집에 불을 질렀다.

 “불이다. 언덕 위에 불이 났다.” 노인의 집이 활활 타자, 그제서야 주민들은 불을 끄기 위해 양동이를 들고 허겁지겁 언덕 위로 올라왔다. 바다에서 놀던 아이들도 불구경을 위해 노인의 집으로 달음박질쳤다.

 그 순간, 엄청난 굉음과 함께 칼날 같은 물보라를 동반한 파도가 마을을 덮쳤다. 마을 주민들은 넋이 나간 얼굴로 파도가 마을을 삽시간에 쓸어버리는 장면을 목격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만약 노인이 불을 지르지 않았다면 모두 어떻게 됐겠는가. 이 일화를 실은 일본 교과서는 그 파도를 쓰나미(津波)라고 했다.

 마을 사람들을 구해낸 노인의 직감이 내게도 있었던 것 같다. 쓰나미가 일어나기 일주일 전의 일이다. 그해 대학을 졸업하는 먼 친척의 조카가 졸업 기념으로 태국 푸켓에 간다며 들떠 있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예감이 좋지 않았다.

 “푸켓 말고 스키장으로 가면 안 되겠니?” 아이는 실망한 구석이 역력했다. 벌써 수영복을 챙기고 친구들과 놀러갈 만반의 준비를 끝낸 모양이었다. 하지만 영능력자인 내 말을 듣고 여행지를 국내 스키장으로 과감하게 바꿨다. 만약 그 애가 태국 푸켓에 갔다면 쓰나미를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 나는 기분 나쁜 예감의 정체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단지 그 애가 푸켓에 가면 큰 사고를 당할 것 같아 미리 막았을 뿐이다. 만약 그 무엇의 정체를 정확히 알았다면 많은 인명을 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내 능력 밖의 일이었기에, 더욱 가슴이 아프고 안타깝다.

 쓰나미로 큰 고통을 받은 남아시아 해안지역 주민들이 ‘쓰나미 유령’으로 고통 받고 있다는 기사를 누군가 내게 읽어 주었다. 20만 명에 가까운 인명피해가 났으니 얼마나 흉흉한 괴담이 돌겠는가. 영가를 보았다는 사람, 소리를 들었다는 사람, 심지어 영가에 씌었다는 사람들까지,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전 세계로 퍼지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한 강변지역은 밤마다 살려달라는 비명소리가 울려 퍼진다고 한다. 태국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택시에 열 명을 태웠는데 내린 사람은 두 명뿐이었다, 물귀신이 자신을 물속으로 끌고 가려 했다는 등의 괴담이 끊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지역 주민들은 쓰나미 희생자를 위한 진혼제에 열을 올리고 있다.

 나는 희생지역 주민들이 열심히 진혼제를 올린다는 기사를 읽고, 일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수많은 희생자를 낸 지역에서 진혼제를 올리지 않는다면, 영가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떤 사고든 간에 많은 희생자를 냈다면 반드시 진혼제를 올려줘야 한다.

 1953년 부산 다대포 앞바다에서 여객선이 침몰해 360여명이 넘는 승객이 사망하는 대참사가 있었다. 5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망자 명단을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시신도 다 인양하지 못한 채 사건은 잊혀져 갔다.

 1990년대 말, 유명 전자업체 대표인 Y씨는 그때의 사고로 돌아가신 부친을 위한 구명시식을 올렸다. 구명시식을 시작하자 Y씨 부친 영가뿐 아니라 같이 사망한 익사자 영가까지 모두 나타났다. 함께 몰려다니는 익사자 영가의 습성 때문이었다.

 Y씨의 부친 영가는 다른 익사자 영가에 비해 의연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대다수 익사자 영가가 배고픔과 추위를 호소하는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영가는 아들이 훌륭하게 성장해 기쁘다면서 자신과 다른 영가를 위해 ‘만두를 빚어 제사를 지내 달라’고 부탁했다. 구명시식 후, 아들은 만두를 빚어 제사를 올렸고 이후 영가의 보답으로 뜻하지 않게 좋은 일이 생겼다.

 만약 익사자 영가를 위한 제사를 올리지 않을 경우, 영가는 무서운 중음신으로 돌변할 수 있다. 모처에 위치한 불교박물관에서 128명의 위패를 모신 대규모 구명시식을 올렸을 때의 일이다. 합동 구명시식이 시작되는 순간 갑자기 법단 쪽으로 돌이 날아왔다.

 그날 참석한 150여명의 눈은 일제히 법단으로 향했다. 그때였다. 내 앞에 흰색 소복을 입은 여인 영가가 나를 째려보며 서 있는 것이었다. 나는 최대한 예의를 차려 구명시식을 방해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영가는 “이 땅은 내 땅이니 당장 나가라”며 고함을 질렀다.

 알고 보니 그녀는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바로 그 장소에서 남편을 기다리다 세 아이와 함께 익사하고 말았다. 자식에게 애착이 강했던 여인은 아이를 잃었다는 슬픔에 70여년 가까이 구천을 떠도는 중음신으로 살며 강한 염력을 갖게 됐다.

 나는 가까스로 법문을 통해 영가를 달랬다. “반드시 그대를 기쁘게 해드릴 테니, 오늘 구명시식을 성공적으로 끝낼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러자 영가도 태도를 바꿔 합동구명시식이 무사히 끝날 수 있도록 도와줬다. 나는 영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모자수자상을 제작해 법단에 모시도록 당부했다. 이후 박물관은 많은 이들이 찾는 명소가 됐다.

 21세기 대재앙이라고 불리는 동남아시아 쓰나미에 이어 이번에는 일본에서 강도 9.0의 지진으로 동북부지방에 쓰나미가 몰려와 큰 피해를 입었다. 지난번 동남아시아에서는 약 17만 명이 사망했다. 일본은 현재 수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비공식 집계하고 있다. 게다가 원전사고까지 겹쳐 일본 전체가 큰 혼란에 빠져있다.

 이런 큰 재해에는 아무리 개인적으로 진혼제를 올린다 해도 역부족이다. 이번 대참극의 진혼제는 전 세계인이 하나가 돼 위로해야 더 큰 희생을 막을 수 있다. 앞으로 나에게 기회가 닿는다면 일본 쓰나미 희생자 영가들을 위해 현지에서 진혼제를 올려드리고 싶다.

 후암미래연구소 대표 www.hooa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