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남자들도 귀고리 했다, 클수록 신분↑

기사등록 2011/02/15 17:07:53 최종수정 2016/12/27 21:43:05
【서울=뉴시스】김정환 기자 = 2008년 이준기(29) 주연 SBS TV 드라마 '일지매'에 나온 '시완'(김무열)이 귀고리를 착용하는 모습이 방송되면서 한바탕 논란이 일었다.

 서구화됐다는 요즘도 일부 남자연예인이나 연예인만큼 자유로운 직업을 가진 남성들이나 착용하는 귀고리를 엄격한 유교문화가 지배하던 조선시대 지배계급 남성들이 했다는 사실에 시청자들이 혼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배경이 조선 중기였으므로 고증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당시 기록을 보면, 당대 남자들이 귀를 뚫어 귀고리를 착용한 채 도폿자락을 휘날리며 도성의 거리를 활보했음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들이 곳곳에 등장한다. 

 '조선왕조실록' 중종 8년(1513) 1월7일자에서는 '양평군의 나이 9세 때 큰 진주 귀고리를 달았으니…'라는 대목이 눈에 띈다. 바로 '양평군 사칭 사건'이다. 당시 판의금부사 이손이 양평군을 사칭하고 다니는 만손을 탄핵했다. 이때 진짜 양평군을 확인하기 위한 방법이 큰 진주귀고리를 단 귓불의 구멍이었다. 양평군은 9세 때부터 큰 진주귀고리를 달고 다녀 귓불에 난 구멍이 넓고 컸는데 가짜 양평군은 아예 구멍조차 없었다.

 이것만으로도 귀고리가 고귀한 왕자들도 애용했고, 그 크기가 신분의 높고 낮음을 대변했던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같은 사실은 근래 출토된 유물로도 입증된다. 조선시대 무덤 5000여기가 출토된 서울 은평구 뉴타운 12호 무덤에서 수습한 유물에는 귀고리 한 쌍이 들어있었다. 주인의 성별을 추정할 수 있는 단서는 함께 묻혀있던 물고기 모양 장신구와 백자 술병이었다. 이로써 귀고리의 주인은 조선시대 관리를 지낸 남성으로 파악됐다.

 고유의 남성 귀고리 문화는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표적인 것이 신라의 화랑이다. 젊음과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화려한 귀걸이를 많이 하고 다닌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까지 성별이 확인된 국내 남성 귀고리 1호 착용자는 경기 김포 양촌리에서 발굴된 3세기 초 금귀고리의 주인이었다. 당시 이 일대를 지배한 나라는 백제였다. 중국 당나라에 파견된 고구려, 백제, 신라 외교관의 모습을 그린 '왕회도' 등을 보면 귀고리를 착용한 삼국시대 남성들의 모습이 있다.

 이처럼 1500여년의 전통을 지닌 조선 남자들의 귀고리 문화는 17세기 들어와 갑자기 사라진다.

 1572년 선조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몸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라고 거론하며 "우리나라의 크고 작은 사내아이들이 귀를 뚫고 귀고리를 달아 중국인들에게 조소를 받으니 부끄러운 일이다. 이후로는 오랑캐의 풍속을 고치도록 하라. 한양은 이달을 기한으로 하되 혹 따르지 않는 자는 헌부가 엄하게 벌주도록 하라"고 전교했다는 기록으로 볼 때 왕명으로 금지됐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오랜 전통을 이처럼 갑자기 금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효'는 핑계일 뿐 실제로는 귀고리 때문에 금과은의 수입이 늘어나 국가 경제적으로 큰 문제가 됐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연구 결과다. 

 17일 밤 10시 KBS 1TV '역사스페셜'이 고유의 귀고리 문화를 다룬다. 귀고리 문화의 유래에서 종말에 이르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다. 한국문화의 국제성 역동성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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